최종편집: 2025-01-16 09:03

  • 구름조금속초-0.7℃
  • 흐림-9.2℃
  • 흐림철원-6.2℃
  • 흐림동두천-4.7℃
  • 흐림파주-6.0℃
  • 맑음대관령-8.5℃
  • 흐림춘천-8.9℃
  • 흐림백령도1.9℃
  • 맑음북강릉-2.1℃
  • 맑음강릉-0.7℃
  • 구름조금동해-2.1℃
  • 흐림서울-2.9℃
  • 흐림인천-2.3℃
  • 흐림원주-4.5℃
  • 맑음울릉도-0.4℃
  • 흐림수원-3.1℃
  • 흐림영월-7.1℃
  • 흐림충주-4.5℃
  • 흐림서산-1.5℃
  • 맑음울진-2.2℃
  • 눈청주-3.1℃
  • 흐림대전-2.4℃
  • 흐림추풍령-3.4℃
  • 흐림안동-5.1℃
  • 흐림상주-2.8℃
  • 맑음포항-2.1℃
  • 흐림군산-1.7℃
  • 구름많음대구-1.6℃
  • 흐림전주-0.9℃
  • 맑음울산-1.0℃
  • 맑음창원-3.9℃
  • 흐림광주-1.6℃
  • 맑음부산-2.4℃
  • 맑음통영-3.5℃
  • 흐림목포-1.4℃
  • 구름조금여수-2.1℃
  • 구름많음흑산도3.2℃
  • 구름많음완도-0.9℃
  • 흐림고창-2.5℃
  • 맑음순천-3.7℃
  • 흐림홍성(예)-1.9℃
  • 흐림-3.0℃
  • 흐림제주5.0℃
  • 흐림고산5.3℃
  • 흐림성산3.6℃
  • 구름많음서귀포3.2℃
  • 맑음진주-7.7℃
  • 흐림강화-3.3℃
  • 흐림양평-4.9℃
  • 흐림이천-5.1℃
  • 흐림인제-7.2℃
  • 흐림홍천-8.7℃
  • 맑음태백-7.3℃
  • 흐림정선군-7.0℃
  • 흐림제천-5.8℃
  • 흐림보은-4.7℃
  • 흐림천안-3.5℃
  • 흐림보령-1.1℃
  • 흐림부여-2.8℃
  • 흐림금산-3.8℃
  • 흐림-3.8℃
  • 흐림부안-0.7℃
  • 흐림임실-3.3℃
  • 흐림정읍-1.9℃
  • 흐림남원-3.3℃
  • 흐림장수-4.8℃
  • 흐림고창군-2.5℃
  • 구름많음영광군-2.0℃
  • 맑음김해시-4.4℃
  • 흐림순창군-3.1℃
  • 맑음북창원-2.8℃
  • 맑음양산시-1.3℃
  • 흐림보성군-1.2℃
  • 맑음강진군-2.3℃
  • 맑음장흥-3.6℃
  • 흐림해남-1.9℃
  • 흐림고흥-2.5℃
  • 맑음의령군-8.8℃
  • 흐림함양군0.1℃
  • 구름많음광양시-3.5℃
  • 흐림진도군-0.3℃
  • 맑음봉화-6.6℃
  • 흐림영주-6.9℃
  • 흐림문경-3.9℃
  • 맑음청송군-10.9℃
  • 맑음영덕-4.2℃
  • 흐림의성-7.0℃
  • 흐림구미-3.2℃
  • 흐림영천-3.3℃
  • 맑음경주시-2.1℃
  • 흐림거창-6.0℃
  • 맑음합천-7.6℃
  • 흐림밀양-6.2℃
  • 흐림산청0.3℃
  • 맑음거제-2.0℃
  • 맑음남해-3.8℃
  • 맑음-2.8℃
기상청 제공
시사픽 로고
이지수 옹기장 “내 나이 여든둘, ‘도고 옹기’ 후계자 찾고 싶어”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역 보도자료

이지수 옹기장 “내 나이 여든둘, ‘도고 옹기’ 후계자 찾고 싶어”

충남 무형문화재 이지수 장인 “과거 아산은 옹기의 고장, 이유는.”

이지수 옹기장 “내 나이 여든둘, ‘도고 옹기’ 후계자 찾고 싶어”

 

[시사픽] 항아리 용기가 대세던 1960년대. 아산은 옹기의 고장이었다.

온양 시내 모종동은 흙이 좋기로 유명했고 염치·도고·선장 등 아산 곳곳 옹기가마들은 모두 성업을 이뤘다.

그중에서도 도고면 금산리는 한때 300명도 넘는 옹기공이 모여 살던 장항선 최고 옹기마을로 불렸다.

삽교천이 방조제로 막히기 전에는 인주와 선장까지 배가 들어왔는데, 배에 실려 온 새우젓과 소금이 금산마을 옹기에 담겨 전국으로 팔려나가면서 그 우수성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도고에만 옹기가마가 5기에 달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스테인리스와 플라스틱 용기가 등장하고 김치냉장고까지 대중화되면서 옹기는 설 자리를 잃었다.

좋은 흙을 고르는 것부터 잿물을 만들고 1200℃ 불가마에 구워내기까지,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는 중노동이지만 옹기로는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게 됐다.

그 많던 옹기장들은 하나둘 마을을 떠나거나, 다른 일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든이 넘은 이지수 옹기장은 여전히 옹기가마를 지키고 있다.

옹기장이셨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16살 때부터 흙 만지는 법을 배웠다고 하니 벌써 60년도 넘었다.

힘에 부칠 때도 많다.

하지만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숨 쉬는 그릇’을 만든다는 자부심과 ‘천년의 지혜가 담긴’ 전통 옹기의 명맥을 이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으로 장인은 오늘도 손에서 흙을 놓지 못한다.

“선장, 도고 이쪽 지역은 우물을 파도 짠물이 나왔어요. 그 물을 퍼다 옹기에 담아두면 일주일이면 저절로 정화되고 짠기가 사라졌죠. 수도도 정수시설도 없던 시절에 옹기 덕에 그렇게 먹고 살았어요. 고추장, 된장, 김치 같은 우리의 좋은 발효 음식도 옹기가 없었다면 발달할 수 있었겠어요? 이렇게 좋은 그릇인데, 이젠 만드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얼마 없어요. 플라스틱이 가볍고 편리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좋은 옹기의 맥이 끊기게 둘 수야 없지요.” 故김수환 추기경의 아호가 ‘옹기’였을 만큼 한국 천주교와 옹기는 역사가 깊다.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산속에 몰래 교우촌을 이루고 옹기업에 종사했는데, 옹기장수로 위장해 동료 신자들의 집을 방문하며 안위를 살피기도 했다고. 이지수 장인 집안이 대대로 옹기업에 종사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에게 옹기는 장인이자 종교인으로서 받아들인 숭고한 가업이기도 한 셈이다.

충청남도는 이지수 장인 가문의 역사와 노력, 공헌 등을 인정해 그의 집안을 2000년 충청남도 전통문화가정으로 이지수 장인을 2008년 충청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하지만 3대째 이어지던 가업의 명맥은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

이수자 교육까지 마친 아들이 가업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옹기 수요 자체도 줄어 수입이 많지 않은 데다, 무형문화재에 지정돼 자타공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장인’ 반열에 올라도 전승지원금은 불과 월 120만원. 월 200만원 벌기도 녹록지 않은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결혼해 가정까지 꾸린 아들에게 이 힘든 길을 따라오라 말하기도 어렵다.

이지수 장인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도고 옹기발효음식 전시·체험관에서 기초교육 과정, 전문가 양성과정을 운영하며 도고 옹기의 명맥을 이어줄 후계자를 찾고 있다.

옹기 기술을 배우려는 이들은 제법 있지만 본격적으로 이 길을 걷겠다고 나선 이는 아직 없어 고민이다.

“가르치다 보면 손재주 있는 사람, 가르치면 뭔가 될 것 같은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어느 정도 배우고 나면 그만둬버려서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알려주고 싶은 비법이 많은데 알려줄 사람이 없어요.” 그래도 옹기의 효과를 알아보고 찾아주는 이들 덕분에 기운을 얻는다 주말이면 도고 옹기발효음식 전시·체험관에는 전국의 다양한 옹기를 관람하고 옹기 만들기 체험을 하기 위한 이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전통 옹기를 구입할 수도 있는데, 기념품 삼아 사간 이들에게 “써보니 너무 좋아 더 사러 왔다”는 인사를 들으면 그렇게 보람찰 수가 없다고. 그때마다 그는 없던 힘도 다시 끌어모은다.

“내 나이가 이제 여든둘이다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저 여기 이 자리에서 내가 지금 하는 일 해줄 사람, 진득하게 오래갈 사람 하나 잘 가르쳐두고 가는 거. 그거 말곤 바라는 게 없다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에요.”





포토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