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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사간 협력과 향토 효도 사업 펼쳐[시사픽] 정선규 홍성군 일반건설업협의회장(59)이 25일 세종시에서 열린 제14회 풀뿌리자치대상 자랑스런충청인상 지역사회봉사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사회의 첫발을 건설업으로 시작한 정 회장은 홍성군 건설업체들의 이익과 회원사간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불혹의 나이에 홍성군 일반건설업 협회를 만들어 이끌어 오고 있다. 그는 서른 나이에 ㈜청경종합건설을 설립해 운영하며 지역업체들의 결속된 힘이 없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목도하고 10년 회사 경영의 노하우를 살려 건설업체들의 단체를 만들었던 것. 정 회장은 "홍성군내 일반건설 협의회를 만들어 성실 시공의 기준을 만들었고 올바른 건설문화를 정립 시키는데 나름대로 역할을 했다”며 "현재도 홍성일반건설협의회가 활발하게 운영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정 회장은 협의회 회원들과 함께 매년 읍·면사무소에 불우이웃돕기에 참여하고 있으며 탈선한 청소년 보호소 학생들에게 나눔의 행사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또 올해는 고향 마을을 찾아 어르신께 복달임 식사를 제공하는 등 향토 효도사업에도 앞장서고 있다. 정 회장은 "지역을 위한 효도사업은 매년 꾸준히 시행할 것이며 불우하고 가계가 어려운 주위 군민에게 베풀며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풀뿌리자치대상 자랑스런충청인상’은 충청지역신문협회에서 주관·주최하는 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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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정체성 확립 및 발전 헌신[시사픽] 김덕배 홍성군의회 의원이 25일 제14회 풀뿌리자치대상 자랑스런충청인상 시상식에서 의정발전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올해 3선에 성공한 김 의원은 홍성군의회 개원 이래 사상 처음 초선임에도 의장을 역임하는 등 리더십을 인정받았다. 특히 백야 김좌진 장군 선양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호명학교 복원사업을 통한 살아있는 교육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갈산면주민들과 함께 폐기물처리시설 설치반대운동을 적극 추진해 환경부의 환경영향평가서 부동의 처분을 이끌어내며 주민과 호흡하는 의정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아울러 홍성군의 미래성장동력인 유망기업 유치를 위해 산업단지 유치업종 확대 필요성을 알리며 지역경제 활성화와 세수확보에 노력해 오고 있다. 더욱이 김태흠 충청남도지사의 공약인 충남의병기념관 건립을 의병도시 홍성에 건립해야한다는 성명서를 대표발의 하는 등 왕성한 의정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편 ‘풀뿌리자치대상 자랑스런충청인상’은 충청지역신문협회에서 주관·주최하는 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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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충절의 고장 충남에 있어야 할 의병기념관 ④-1"병오년 6월 18일 음산한 비가 내렸다. 우리 일행 9명은 흐느끼며 대궐을 나와 기차를 타기 위해 일본 병정을 따라서 남대문 밖으로 갔다. 전송하러 나온 벗들이 나라를 떠나는 회포와 더욱이 어디에 머무를 것인지 몰라 눈물을 흘리는 사이 기차는 출발했다. 눈앞에 펼쳐진 금수강산을 바라보니 또한 비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저녁 늦게 초량에 도착, 저녁밥을 먹은 후 세차게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배에 오르니, 끝없이 밀려오는 풍랑은 사람으로 하여금 현기증을 일으키게 한다.” [시사픽] 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1.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①) 4-2.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②) 4-3.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③)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병오년 6월 18일 음산한 비가 내렸다. 우리 일행 9명은 흐느끼며 대궐을 나와 기차를 타기 위해 일본 병정을 따라서 남대문 밖으로 갔다. 전송하러 나온 벗들이 나라를 떠나는 회포와 더욱이 어디에 머무를 것인지 몰라 눈물을 흘리는 사이 기차는 출발했다. 눈앞에 펼쳐진 금수강산을 바라보니 또한 비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저녁 늦게 초량에 도착, 저녁밥을 먹은 후 세차게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배에 오르니, 끝없이 밀려오는 풍랑은 사람으로 하여금 현기증을 일으키게 한다.” 병오년 홍주의진에 참여했다가 붙잡힌 뒤 일제에 의해 대마도로 유배를 떠나는 홍주9의사 가운데 한분이셨던 보령의 유병장 유준근 선생이 쓴 마도일기(馬島日記)의 한부분이다. 5월 19일 민종식의 홍주의병이 홍주성을 점령했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그달 31일 성이 함락되면서 80여 명의 의병이 순국하고 145명이 생포되었는데, 그중 80여명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6월 9일(음력 윤 4월 18일) 일본군사령부로 끌려갔던 의병들은 7월 말 70여 명이 석방되었지만, 홍주의진의 참모였던 남규진·문석환·신보균·신현두·안항식·유준근·이상두·이식·최상집 등 이른바 '홍주 9의사'는 대마도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들 중 남규진·신현두·유준근·이식 선생 등 4명의 의사는 일제에 의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고국산천을 떠나 적국인 대마도로 호송되는 선생의 쓰라린 심정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병오 홍주의진은 을사늑약(1905)이 체결되자 을미년(1895)에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지산 김복한 선생과 복암 이설 선생이 상경하여 을사5적과 일본인 하세가와 등을 척결할 것과 의병을 모집해 일본세력을 축출할 것 등을 상소했다. 이때 청양 정선에 거주하던 전 참판 민종식도 상경해 상소를 올리고자 이설에게 상소문 초안을 부탁하고 민영익과 민영휘 등을 만나 상의했으나 상소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니 그만두라는 그들의 만류와 김복한, 이설 등이 체포되고 상소문마저 압수됐다는 말을 듣고 다시 정산으로 돌아왔다. 민종식 선생은 낙향하여 의병 봉기를 계획했는데 마침 홍주 을미의병의 주도자로 홍주향교 전교를 맡고 있던 안병찬과 채광묵 등이 홍성·청양 일대의 유생들과 함께 의병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먼저 유림에서 최익현은 1906년 1월에 충남 노성(魯城) 궐리사(闕里祠)에서 원근의 유림을 모아 강연을 열고 시국의 절박함을 알리며 일치단결해서 국권회복에 동참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홍주와 청양의 유림에서 민종식을 응원(應援)으로 최익현을 맹주(盟主)하고 거의할 것을 요청했지만 최익현은 전북 태인으로 발길을 옮겨 그곳에서 거병하게 된다. 최익현 선생이 떠나자 유림은 민종식 선생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부탁하고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생은 의병의 총수 자리에 올랐다. 의병장에 오른 선생은 가산을 팔아 군자금 5만냥(2천원)을 마련하여 군수품으로 제공하고 1906년 3월15일 정산 천장리에서 거병했다. 민종식 선생과 홍주·청양의 지사들은 3월 17일 예산 광시 장터로 진군하고 다음날 의병들은 홍주성으로 진군했다. 이들은 홍주성 밖 하우령(지금의 홍성군 구항면과 홍성읍 우회도로의 경계지점)에 진을 쳤지만 관군의 저항으로 청양 화성 합천으로 물러나고 3월19일 새벽 공주진위대와 서울시위대 병력 200여명과 합천에서 마주해 전투에 들어갔다. 의병들은 화승총과 칼을 들고 싸웠지만 관군을 무찌르지 못하고 의병 수뇌부인 안병찬과 박창로를 비롯 수십 명이 체포되어 공주관찰부로 압송되고 말았다. 이때 압송된 안병찬 등은 수일 후 방면되어 다시 의병에 합류하게 된다. 1차 기병에 실패한 민종식은 5월 12일 흩어졌던 의병들을 모아 충남 홍산군 지티동 (현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에서 다시 국권회복의 기치를 들었다. 민종식의 처남인 이용규가 전라도에서 모집한 의병을 중심으로 민종식을 대장에 재추대하고 이튿날 서천읍에 이르니 의병은 1천여명으로 늘어났다. 다음날 비인을 점령했으며, 유준근 등 의병이 합류해 보령 남포성에서 5일 동안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에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치고 광천을 거쳐 결성으로 진군해 하루를 보내고 5월 19일 홍주로 들어가 삼신당리에서 일본군을 물리친 의병들은 마침내 홍주성을 점령하게 된다. 당시 상황을 황현의 매천야록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전 참판 민종식이 의병을 일으켜 홍주로 들어갔다. 종식은 판서 민영상의 아들로서 국변(명성황후의 살해)을 아프게 생각하여 가재를 풀어서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를 사들이니, 호서지방의 사민들은 추종하는 자가 날로 증가하였다. 남포·보령 제군을 습격하여 그 병기를 거두어들이고 순찰하는 일본군을 사로잡아 참수하고 5월 20일에 홍주로 들어갔다. 지난번 일본군은 홍주성은 족히 믿을 만하다 하여 포병 약간을 배치하고 대포 10여 문을 매설하였는데, 모두 민종식의 소유가 되었고, 부서별로 나누어 지키니, 명성과 위세가 몹시 왕성했다.” 매천 선생 역시 1910년 국난을 당하자 순절을 택한 선비였으니 그가 홍주의진을 보는 시각은 자명하다. 다만 매천은 직접 본 것을 기록하기보다는 전해들은 것을 기술했다는 점에서 홍주성 입성 날짜 등에 차이가 있다. 또 홍주의병의 홍주성 입성 상황을 홍순대는 해암사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홍주성으로 가는 도중에 광천장터에 살고 있는 왜놈 6명을 사로잡았다. 4월 26일(양력 5월 19일) 홍주 남산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의 병력은 5천여 명에 이르렀다. 마침 이날은 홍주 장날이기도 하였다. 오후 4시쯤 성을 함락하려고 하였으나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홍주성의 4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우리 진영의 아주 날쌘 병정 2명이 성에 들어갈 곳을 찾다가 하수구를 발견하고 거기로 들어가 4대문을 열었다. 드디어 홍주성은 함락되었다. 대문을 연 두 병정은 신천문과 천학순이었다. 의병들이 성안에 살고 있던 왜적을 잡으려 했으나 그들은 성이 무너지기 전에 이미 달아나 버렸다.” 이처럼 홍주의진은 마침내 홍주성을 무력으로 탈취했다. 홍주성에서 도망친 일본군은 공주에서 병력을 지원 받았다. 일본군과 관군은 홍주성을 빼앗긴지 하루만에 반격을 해왔다. 하지만 민종식이 이끄는 홍주의병은 21일 수원 헌병 부대에서 파견된 헌병과 경찰 혼성부대를 격퇴하고, 24일에는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 부대와 공주 진위대에서 파견한 관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또 29일에는 체포한 일본인 3명과 일진회원 2명을 총살하였다. 일본군이 연이어 패배하고 전세가 의병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견을 명령하였다. 하세가와 사령관의 명령을 받은 일본군 보병 60연대의 대대장 다나까 소좌는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반개 소대 그리고 전주 수비대 1개 소대를 거느리고 30일 홍주성을 포위하였다. 일본군은 의병보다 화력이 우세하였으며 전투 경험이 많은 병사들이었다. 5월 31일 새벽 2시 반 일본군 기마병 폭발반이 동문을 폭파하였다. 이를 신호로 일본군 보병과 헌병대 그리고 경찰대가 기관총을 쏘며 성문 안으로 침입하였다. 또한 2중대 1소대와 4중대 1소대는 의병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그렇게 하여 31일 새벽 4시경 홍주성은 일본군에 의해 다시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기마병을 시켜 의병을 추격하여 사살하였다. 이때 양민들 역시 다수가 살해되었다. 미명의 새벽, 홍주성 동문이었던 조양문을 폭파하고 들이닥친 일본군은 닥치는 대로 살상을 저지르니 홍주성은 일시에 아비규환 속에 빠졌다. 민종식 선생을 비롯한 상당수의 의병들은 성 밖으로 몸을 피했으나 채광묵 부자를 비롯한 80여명의 의병들은 장렬한 최후를 맞았고, 생포된 의병이 145명이었으니, 홍주성을 점령한 지 13일째인 5월 31일이었다. 이날의 격렬한 전투에 대하여 대한매일신보 6월 15일자에는 "홍주군 정형을 들은 즉 일본 군대가 의병을 습격할 때 의병은 기미를 알고 흩어져 모두 제거하지 못하고 무고한 거주민을 남기지 않고 도륙하고 일로전쟁시 만주를 점령함과 같이 일본인민을 점차 이주케 할 계획이라 하니 한 사람의 무고한 백성을 죽이고 천하를 얻어도 사람들이 참지 못하는 바이거늘 하물며 한 주(州)의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고 한 성을 점령했으니 이를 가히 참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너무나 비참하고 눈물이 흘러내려 할 말을 잇지를 못하겠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매천야록’에는 "홍주 10리 안에는 밀과 보리가 모두 없어졌으니, 병마에 짓밟힌 바가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했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이날 포로로 잡힌 유준근·이식·신현두·남규진은 종신 유배형, 문석환·안항식·신보균·최상집·이상두는 3년 유배형을 받고 대마도로 끌려갔다. 이들보다 두달 후 태인에서 붙잡힌 최익현과 임병찬은 3년 유배형을 받고 역시 대마도에서 이들과 조우한다. 지산 김복한 선생이 거의한 을미의병 때 초모사로 외지에 나가 의병을 모집해 붙잡히지 않았던 이세영도 6월에 체포되어 황주의 철도로 유배가게 되었다. 한편 민종식 선생은 이날 성을 탈출해 예산의 이남규 집으로 피신해 재차 거의를 꾀했지만 일진회원의 밀고로 11월 17일 새벽에 일본 헌병과 관군 그리고 일진회원의 습격을 받았다. 이때 이남규와 이충구 부자가 체포되고, 민종식 선생은 다시 공주로 피신하였으나 11월 20일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도중 이남규 부자는 신창 평촌에서 살해되었다. 민종식 선생은 1907년 7월 3일 평리원 재판결과 교수형이 언도되었고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 유배형으로 감형되어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12월 순종 즉위에 맞춰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고향에 은거하다 1917년 6월 숨을 거뒀지만 일제는 민종식 선생을 ‘폭도’로 규정해 선영에 묻히지 못하다가 3개월이 지난 뒤에야 선영에 묻힐 수 있었다. ( ※ 이 기사는 호서역사문화연구원 이명우 원장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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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충절의 고장 충남에 있어야 할 의병기념관 ③[시사픽] 충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1.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①) 4-2.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②) 4-3.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③)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동학혁명을 빙자해 군대를 파견하고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구제도를 일거에 바꾸는 갑오경장(1894년)을 단행했다. 그러나 조선의 주도 세력인 유림은 일본이 주도했던 경장에 반대해 곳곳에서 저항했다. 특히 경장을 통해 기존의 복제를 바꾸고 일본에 비협조적인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1895년)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일본의 만행을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쳤고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의병들이 일어났다. 여기에 더해 조정이 단발령을 선포하자 의병활동은 더욱 거세게 일었다. 당시 유림은 외세에 맞서 척사(斥邪)를 주창했고 이들은 의리론에 입각해 외세에 대항한 것이다. 충청권에선 대표적으로 남당 한원진의 호론계열인 남당학파, 연재학파 등이 거의(擧義)와 순절(殉節)로 의리를 보였고 낙론계인 간재 전우의 간재학파는 자정(自靖)의리로 일제에 대항했다. 이들 외에도 화서 이항로의 학맥을 잇는 화서학파는 강원과 충북에서 활동하며 의암 유인석, 면암 최익현을 중심으로 위정척사론에 바탕을 두고 의병을 일으켰으며 전라도의 노사 기정진의 문인 중심의 노사학파, 경상도에선 한주 이진상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한주학파가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남당학파는 한원진 이후 한간 김한록과 운평 송능상 등이 호론계를 이끌었으나 정치적으로 벽파의 거두였던 김한록과 벽파세력인 사촌누이 정순왕후(영조의 계비) 사후 몰락해 세가 크게 줄었지만 심재 송환기, 강재 송치규에 이어 지산 김복한 선생이 남당의 학맥을 이어갔고 송치규의 문인인 송달수를 통해 연재 송병선, 심석재 송병순으로 우암 송시열의 가학을 이어가는 연재학파로 발달했다. 반면 외암 이간 선생의 낙론계열은 율곡을 사숙한 농암 김창협과 삼연 김창흡, 도암 이재를 중심으로 발달해 미호 김원행으로 연결됐고 근재 박윤원을 거쳐 매산 홍직필에 이어 고산 임헌회가 간재 전우에게로 학통을 이었으며 이들은 자정의리를 주장했다. 충남에서는 홍주의병에 앞서 공주부 진잠현감 출신 문석봉이 공주 유성(현 대전광역시 유성구)에서 명성황후 시해와 폐비조칙을 ‘천고에 없는 대변(大變)’이라며 반발해 ‘국수보복(國讐報復)’을 기치로 9월 18일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단발령이 공포되자 지산 김복한과 그의 이종형인 복암 이설, 그리고 홍주향교 전교인 안병찬 등이 주동이 되어 홍주에서 거의(擧義)하게 됐다. 충남의 을미의병을 주도한 이들은 홍주향교를 중심으로 활동해온 남당 한원진의 호론계열 유림들이었다. 의병을 이끈 지산 김복한은 홍주향교 도유사이고 의병에 참여한 서승태 역시 홍주향교 도유사 출신이며 홍주향교는 항일의병의 진원지였다. 지산 김복한은 병자호란 당시 자결한 우의정 선원 김상용의 12대손이며 파시조인 수북 김광현의 종손으로 홍주 오촌동(鰲村洞)에서 수복이 복상하며 은거해 이 무렵부터 홍주에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김복한은 1892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성균관 대사성, 승정원 승지 등 당상관에 올랐으나 3년만인 1894년 갑오경장이 발표되자 낙향했는데 이듬해인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종사촌형인 복암 이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앞서 홍주에서 거의 움직임은 1895년 4월부터 시작되었다. 안창식(안병찬의 부) 등은 개화파들에 의한 갑오개혁을 반역행위로 인식하고 보부상들을 동원하여 의병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던 중 8월 20일 명성왕후 시해사건을 계기로 군사를 모집하고 무기를 수집하는 등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이런 활동은 11월 15일 단발령이 공포된 뒤 더욱 구체화 되었다. 안창식 등은 11월 18일 청양의 화성(化城)의 이인영의 집에서 100여명의 유생이 모여 향회를 실시, 이후 180여 명의 의병을 모집했다. 안병찬과 채광묵 등 지방 유생들이 이들을 이끌고 12월 1일 홍주관아에 집결했다. 그들은 관찰사 이승우를 설득하는 한편 참사관 함인학, 경무관 강호선 등을 체포해 구금했다. 12월 3일, 홍주성에 창의소가 설치되었고 김복한을 의병 총수로 추대했다. 김복한은 ‘존화복수(尊華復讎)’라 쓴 기를 세우고 홍주부 관할 22개 군과 홍주군내 27개 면에 통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였다. 관찰사 이승우 역시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이란 이름으로 관내 각 군에 명령을 내려 당일로 군사를 이끌고 오게 하였다. 그러나 관찰사 이승우가 거의의 뜻을 번복하여, 창의소를 차린 뒤 하루만인 12월 4일 김복한과 이설을 비롯해 주동자급 23명이 구금되고, 결국 을미년의 홍주의병은 전투도 없이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이듬해인 1896년 1월 12일 이들 중 김복한·이설·홍건·안병찬·송병직·이상린 등 6명(일명 ‘홍주6의사’)은 서울로 압송되어 2월 23일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선고 당일 고종의 특지로 전원 사면 석방되었다. 한편, 청양에 별도로 창의소를 설치하고 홍주의병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던 청양군수 정인희는 12월 6일 이세영·김정하·이병승 등과 정산에 진을 치고, 12월 7일 공주 방면으로 진격해 철마정(鐵馬汀)일대에서 공주부의 구완희 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또 비록 김복한 등은 관찰사의 배신으로 의병이 와해됐지만 창의 당시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외부로 나섰던 홍주권의 유림은 오랫동안 준비했던 의병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근주는 서산·태안 방면에서 의병을 모집했으며, 전수사 조의현을 찾아 청양으로 가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을미의병 당시 공주지역 소모관으로 나섰던 이세영은 정산 철마정 전투 참가 이후 황재현·이관·김홍제 등과 1896년 2월 아관파천 후 남포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는 등 홍주지역 유림의 끈질긴 항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을미의병은 임진왜란 의병들처럼 근왕이념이 기저에 있지만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과 같이 목표를 위도(衛道)에서 위국(衛國)으로 바꾸어 이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또 을미의병에 참여한 유림들은 김복한과 이설처럼 전직관료 출신의 노론계 호론 중심의 인물들이 의병을 주도했지만 안병찬, 안창식, 박창로, 이세영, 이봉학 등 소론 출신의 지방 유림이 힘을 합쳐 당색의 구별없는 구국투쟁을 벌였다, 유림들은 척사의 대상을 일본제국주의 세력과 개화파 관리집단으로 보고 이들을 물리치기 위한 반개화·반침략 투쟁을 전개해 의병층의 이념적 기반으로 삼았다. ( ※ 이 기사는 호서역사문화연구원 이명우 원장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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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충남 유치 토론회 ‘파행’[시사픽] 육군사관학교 이전과 관련 15일 국회에서 육군사관학교 이전에 대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하려 했지만 이전을 반대하는 시민단체와 육사 출신 인사들의 방해로 토론회가 중지되는 파행을 겪었다. 이날 토론회는 김종민 국회의원과 지방신문인 대전일보가 주최하고 충남도와 홍문표 국회의원이 공동주관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토론회 이전 객석을 점령한 시민단체들은 ‘육사에 호국영령들의 묘가 있음에도 이를 이전하느냐"가 주된 반대 이유였다. 일부에서는 김태흠 충남지사와 충남지역 이전을 반대하는 피켓도 있었지만 이들의 주된 주장은 육사에 묻힌 1기와 2기 250명 등 선배 묘역의 이전 반대가 주를 이뤘다. 결국 이날 토론회는 이세영 교수(건양대 군사학과)가 ‘국방인재 육성 새로운 100년을 여는 길, 육사 이전이 답이다’를 주제로 기조발제 한 것을 끝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욱군사관학교 이전 문제는 대전과 충남 논산의 국방클러스터 조성의 핵심부분이다. 이미 계룡시를 비롯한 대전과 인근 충남지역에는 3군본부를 포함 국방관련 주요시설들이 이전해 있다. 이에 따라 윤석열 대통령은 이 지역 국방 클러스터의 중요성을 인식, 후보시절 육군사관학교 이전을 공약 한 바 있다. 하지만 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통령 후보 당시 경북 안동에 육군사관학교를 이전하겠다는 발언으로 지역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한편 육군사관학교의 충남 이전은 전쟁발발시 교육기능의 유지와 국방 클러스터 조성을 통한 융·복합적 교육 여건, 국방분야 국가 균형발전의 완성 등 이점이 있는 걸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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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충절의 고장 충남에 있어야 할 의병기념관 ➁[시사픽] 충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1.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①) 4-2.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②) 4-3.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③)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역사학자 박은식(朴殷植)은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요 국성(國性)이다”라며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 민족은 외세의 침탈을 당할 때마다 민초들이 분연히 일어나 저항했다. 대표적인 민초들의 조직적인 저항은 임진왜란을 통해 나타났다. 도성이 왜군의 침입에 불과 20여일만에 침탈당하고 개전 초기 관군이 패퇴를 거듭했지만 유생들의 창의로 거병한 의병들은 곳곳에서 왜군들을 괴롭히며 단독으로 성을 탈환하거나 관군과 함께 왜적을 무찔렀다. 임진왜란 때 활약이 컸던 의병장으로는 충청도의 조헌(趙憲)부자·박춘무(朴春茂), 경상도의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정세아(鄭世雅)·권응수(權應銖)·김해(金垓)·곽준(郭鵔)·유종개(柳宗介)·이대기(李大期)·제말(諸沫)·손인갑(孫仁甲)·조종도(趙宗道)·정경세(鄭經世), 전라도의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고종후(高從厚)·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최경회(崔慶會)·김덕령(金德齡)·변사정(邊士貞)·양산숙(梁山璹)·임계영(任啓英), 경기도의 홍계남(洪季男)·우성전(禹性傳)·이정암(李廷馣,) 함경도의 정문부(鄭文孚) 등을 꼽을 수 있다. 또 승병으로는 최초의 승병장인 영규(靈圭)와 휴정(休靜, 西山大師)과 그의 제자들인 황해도의 의엄(義嚴), 강원도의 유정(惟政, 松雲大師), 호남 지리산의 처영(處英)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의병장은 대부분 전직 관료이거나 지역의 명망있는 유림이었지만 거병에 참여한 의병들은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때에도 의병이 봉기했는데 동기는 관군의 패배로 수습하기 어려운 난국을 타개하자는 데 있었다. 호란 중의 의병 활동은 왜란에 비해 활발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왜란에 비해 호란은 짧은 시간에 인조가 성하지맹(城下之盟)으로 청나라에 굴복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충남의 사계 김장생(金長生)은 1627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했다. 또 정봉수(鄭鳳壽)는 강화가 성립된 뒤에도 용골산성(龍骨山城)에서 여러 차례 의병을 이끌고 수만의 후금군을 물리쳐 성을 지키는 데 공을 세웠다. 이어 구한말에는 일제가 일으킨 을미사변(1895)과 을사늑약(1905)에 항거한 의병활동이 눈부시다. 구한말의 의병은 크게 1895∼1896년의 을미의병과 1905∼1910년의 을사, 병오, 정미 의병으로 나뉜다. 을미의병은 1894년 갑오경장을 겪으며 일본에 의해 복제의 변형, 민비시해사건, 그리고 단발령이 발표되자 일어났다. 을미의병의 효시는 유성의병이다. 충남 진잠현의 현감 문석봉(文錫鳳, 1851~1896)은 명성황후가 1895년 음력 8월21일 시해되고 이틀후에 폐비조칙이 발표되자 한달도 채 되기 전인 9월 18일 유성(대전광역시 유성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어 홍주에서 김복한(金福漢)·이설(李偰)·안병찬(安炳瓚)이 12월 1일에 봉기했고, 1896년 1월 하순 유생 이소응(李昭應)이 춘천에서 봉기하여 관찰사 조인승(曺寅承)을 처단한 것을 비롯하여, 금산에서 이은찬(李殷瓚)·허위(許蔿), 강릉에서 민용호(閔龍鎬), 제천에서 유인석(柳麟錫)·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 남한산성·안성에서 김하락(金河洛), 문경에서 이강년(李康秊), 안동에서 권세연(權世淵)·김도화(金道和), 영양에서 김도현(金道鉉), 진주에서 노응규(盧應奎), 장성에서 기우만(奇宇萬) 등이 일어났다. 이들 의병활동은 대부분 실패했지만 의병이 일어난 지 한달만에 김홍집(金弘集) 친일 내각이 붕괴되어 단발령이 철회됐고 김복한의 경우처럼 고종이 재판이 끝나자마자 특사로 풀어주는 등 의병을 선유(宣諭)해 일제는 침략을 일시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제2차 의병전쟁은 일명 을사의병·정미의병이라고도 한다.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결과 일본이 승리하고 소위 을사조약을 통해 통감정치를 시도하자 국권 상실을 우려한 우국지사들의 저항에서 비롯됐다. 이 시기의 의병장으로서 가장 이름난 사람은 홍주의 민종식(閔宗植)이었다. 1906년 5월 홍주를 점령한 민종식부대 1,000여명은 여러 차례 일본 군대의 공격을 물리치고 6월 1일 서울에서 특파된 일본군과 서로 맞섰다. 기관포대와 폭파대로 보강된 일본군을 맞아 분전한 민종식의 의병군은 을사조약 이후 가장 큰 봉기였다. 이어 충남 청양에 머물던 최익현이 전라북도 태인에서 봉기해 토적하려 했으나 순창에서 관군에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고 단식 끝에 순사해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민종식과 최익현의 의병은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켜 1907년 이후에는 전국의 유생과 농민이 봉기하여 가히 독립전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큰 저항 운동으로 발전했다. 특히 정미년(1907)의 한국군대 해산은 의병 활동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1907년 8월 1일 일제가 한국군을 강제 해산하자 이에 항거한 군인들과 의병이 서로 연합하여 대대적인 무장항일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들 해산된 한국군 병사는 각기 지방의 의병군에 가담하여 조직적인 항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 시기의 의병장은 원주의 원용팔(元容八)·민긍호(閔肯鎬), 죽산·안성의 박석여(朴昔如), 양근·여주의 이범주(李范疇), 경상도의 이유인(李裕寅)·이하현(李夏玄)·정환직(鄭換直)·정용기(鄭傭其)·최성집(崔聖執)·신돌석(申乭錫)·김현규(金顯奎), 전라도의 기우만·백낙구(白樂九)·양한규(梁漢奎)·고광순(高光洵)·김동신(金東臣), 함경도의 홍범도(洪範圖), 그리고 충북의 노병대(盧炳大) 등을 들 수 있다. 비록 일본 경찰이 낸 통계이기는 하지만 1908년 의병들은 1976회에 걸쳐 8만2767명의 의병이 참여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이들중 충남의 의병은 217회(11.0%)의 전투에 7666명(9.2%)의 의병이 참여했다. 또 1909년에는 전국적으로 1738회의 전투에 3만8593명이 참여했으며 이 가운데 충남은 1003명(2.5%)의 의병이 138회(7.9%)의 전투를 벌였다. 이들 의병들은 일본군이 주둔한 주요 도시를 제외한 각처에서 일본인을 살해하고 관아를 비롯해 면사무소, 경찰분파소, 우체국 그리고 전당포 등을 파괴했다. 이에 일본군은 의병 토벌에 나서 본국의 군대까지 끌어들여 군사력을 더욱 강화했다. ( ※ 이 기사는 호서역사문화연구원 이명우 원장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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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찰병원 분원 유치 1차 관문 통과[시사픽] 충남 아산이 국립경찰병원 분원 유치 1차 관문을 통과하며 청신호를 밝혔다. 도는 11일 경찰청의 국립경찰병원 분원 부지평가위원회에서 아산시 초사동 경찰타운이 경남 창원, 대구 달성과 함께 후보지로 선정됐다고 밝혔다. 국립경찰병원 분원 아산 설립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 이후인 지난 4월 27일 충남 지역 공약으로 발표됐다. 그러나 경찰청은 돌연 ‘경찰병원 분원 건립 TF’를 구성하며 지난 6월 전국 지자체를 대상으로 공모를 실시했다. 아산을 비롯한 후보지 3곳은 경찰청 요구 조건 충족 여부 확인, 지자체 제출 자료 검토 등 사전 작업과 이번 부지평가위원회 1차 평가를 거쳐 선정됐다. 도는 아산 경찰타운이 △부지 활용 가능성 △병원 건립 용이성 △개발 실행 가능성 △확장 가능성 △도로‧대중교통 접근성 △주변 의료기관과의 협력 용이성 △산업단지와의 연계 가능성 △인구 유입 △주변 지역 환경 △정책적 지원 △비수도권 경찰공무원 접근 편이성 등 전 분야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후보지로 선정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아산은 중부권 메가시티 핵심 도시 중 하나로, 전국 어디에서나 2시간 이내 접근이 가능한 교통망을 갖추고 있다. 아산 후보지는 특히 경찰타운에 위치해 전국 경찰공무원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또 인근에 대규모 주택단지와 산업단지가 있어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며 의료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주변 대학과의 의료네트워크 구축이 가능한 점도 국립경찰병원 분원 설립 최적지로 꼽힌다. 도 관계자는 "국립경찰병원 분원 아산 설립은 대통령 공약사항인 만큼, 최종 후보지로 충남이 선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이달 셋째주부터 진행되는 2차 평가도 최선을 다해 대응, 아산에 국립경찰병원 분원이 설립될 때까지 행정력을 집중하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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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충절의 고장 충남에 있어야 할 의병기념관 ➀[시사픽] 충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1.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①) 4-2.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②) 4-3.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③)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충남도의회는 올 11월 임시회에서 의병운동 기념사업 지원조례를 행정문화위원회에서 발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도의회는 지난달 이종화 의원(홍성2)과 방한일 의원(예산1)이 각각 의병운동 기념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를 대표 발의한 바 있다. 같은 내용의 조례를 지역을 달리한 의원들이 각각 발의한 것은 의병기념관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기념관의 설립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것이란 해석을 낳고 있다. 충남은 일찍이 임진왜란 당시는 물론 일제에 의한 경술국치를 당하기까지 매번 국가의 존망 위기에 의병들이 거의해 외세에 대항해 왔다. 임진왜란 이전 공주에서 계수제독관으로 부임해 제자들을 양성한 중봉 조헌 선생이 공주를 중심으로 자신의 제자를 비롯한 17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해 청주를 탈환하고 금산성으로 향하던 중 금산벌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700여명의 의사 순절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논산의 사계 김장생 선생은 정묘호란 당시 양호호소사로 의병을 모집해 당시 공주로 내려온 소현세자의 호위를 맡기도 했다. 조선말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살해되고 폐비가 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전 승지 지산 김복한 선생과 그의 내종형인 전 응교 복암 이설 선생 그리고 홍주 전교 안병찬 등이 홍주에서 결진해 의병을 일으켰다. 비록 3일만에 관찰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실패했지만 을미의병 가운데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거의였다. 지산 김복한 선생과 복암 이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등박문과 을사5적을 처단할 것 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옥고를 치렀고 후일 김복한 선생은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 사건을 주도했다. 을사늑약이후 홍주성을 점령했던 퇴초자 전 참판 민종식선생은 명성황후의 족손으로 아버지는 고종때 충청도 관찰사와 이조, 호조, 예조, 형조, 공조 판서를 두루 거친 민영상으로 명문출신이다. 그는 김복한, 이설 선생과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정산현(청양군 정산)에서 창의해 한때 홍주성을 함락시켰지만 일본군의 참전으로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이처럼 충남지역에서 활발한 의병 활동이 일어난 이유는 춘추대의에 입각한 선비정신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봉 조헌 선생이나 사계 김장생 선생은 물론 지산 김복한 선생이나 퇴초자 민종식 선생 등의 면면에서 보듯이 이들은 유학자로써 성리학의 근본인 춘추대의에 입각한 선비들이다. 특히 조선말 의병장인 지산 김복한 선생은 조선 후기 율곡과 우암의 학통을 이은 남당 한원진의 호론을 몸소 실천한 실천궁행의 유학자이다. 율곡학파의 정수가 사계 김장생-신독재 김집-우암 송시열-수암 권상하에서 남당 한원진을 거쳐 노론 벽파의 거두 김한록에 이르러 정쟁으로 세가 크게 줄었지만 홍성지역의 남당학파는 송능상-송환기-송치규를 거쳐 지산 김복한과 가학을 계승한 연재학파로 이어졌다. 남당학파와 연재학파의 거의(擧義)와 순절(殉節)은 존화양의(尊華攘夷)를 기본에 둔 위정척사(衛正斥邪)와 춘추대의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다. 또 지산 김복한 선생은 생전에 교육기관인 인지서와 인도공의소를 설립했고 사후 지산 선생의 인도공의소 정신을 이어 설립된 유교부식회는 민족정신과 항일운동을 매헌 윤봉길에게 전해 독립운동에 나선 윤의사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 ※ 이 기사는 호서역사문화연구원 이명우 원장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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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도의회 지역민원상담소 필요한가[시사픽] 충남도의회가 시행 중인 지역민원상담소 무용론이 대두되고 있다. 현재 지역민원상담소는 경기도와 함께 충남도가 유이하게 운용되고 있으며 세종시의 경우 지난해 민원상담소 시행조례를 제정했지만 세종시의회가 얼마 전 조례 폐기를 결정했다. 세종시의회의 이 같은 결정은 경기도나 충남도와는 다른 지역적 문제도 있지만 타 지역의 민원상담소 운용이 효율적이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충남도의 경우 지난 2019년 2월 20일 ‘충청남도의회 지역민원상담소 설치·운영에 관한 조례’를 제정·시행했고, 올해 8월 기준 천안 3개소, 아산 2개소와 각 시군별 1개소씩 17개소가 운영 중에 있으며 태안군은 운영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지역민원상담소 민원처리 현황을 보면 홍성과 태안등 지난해 개소되지 않은 2곳을 제외한 16개소에서 783건의 민원을 처리했고 올해 8월 기준 17개소(홍성군 2022년 개소) 319건에 그쳐 개소별 월평균 민원건수는 2~3개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올 들어 8월 기준 천안3, 보령, 청양, 홍성 등 4개소는 단 한 건의 민원 접수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천안1의 경우 1건, 서산, 논산, 당진은 각각 3건, 천안 2, 부여 4건, 계룡 5건등 월평균 1건 미만으로 집계됐다. 지난해에도 논산 2건, 부여와 청양 7건 등 10건 미만이었으며 천안1(11건), 천안 3(14건), 서산(14건) 등은 월평균 1건 남짓한 민원을 접수했다. 이같은 상담소를 운영하기 위해 충남도의회는 운영기본경비와 임차료, 수당 및 공공요금 등 올해 4억6224만원의 예산이 소요될 예정이다. 한편 도의회는 지역민원상담소의 문제점으로 월 방문자 및 상담건수는 감소로 상담소 운영활성화가 필요하나 현실적으로 어려다고 파악했다. 또 지역민원상담소 설치 홍보 및 지속적인 위촉상담사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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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흠 “육사는 논산으로 가야”[시사픽] 김태흠 충남도지사가 8일 "육군사관학교는 논산으로 가야한다"고 말했다. 김 지사는 이날 충남도청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밝히고 "육사이전은 대통령 공약이다”면서 "공약이다, 아니다 논란은 온당치 않다”고 강조했다. 이어 "육사이전을 반대하는 분들이 가지고 있는 논리에 대해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 있다. 성지부문으로 생각한다면 기념물 등을 담을 수 있는 시설물을 만들면 된다”면서 "성지적인 부문은 모순이다”라고 지적했다. 또 "(현재) 육사는 아파트들로 둘러싸여 있어 군인의 가장 기본중의 기본적인 사격훈련도 육사 내에서 할 수 없는 상황이다”면서 "이러한 상황에 서울에 계속 있어야 한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다”고 강조했다. 특히 "대통령도 육사이전에 긍정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다”며 "저도 당연히 논산으로 가야한다는 인식에 같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육사이전은 논산으로 가야한다”고 역설했다. 아울러 이태원 사고 관련 책임소재를 확실히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김 지사는 "책임을 물을 때는 확실하게 해야 한다"면서 "책임질 사람은 확실하게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