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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기념관 위치는 역사‧상징‧정체성을 우선해야 ➅[시사픽] 충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①) 4.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②) 4.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③)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기념관은 설립목표가 뚜렷하며, 특별히 선별된 형태의 기억을 미래세대에 물려주고자 하는 의지를 반영하는 공간이다. 특히 국난을 맞거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사실을 상기시키는 공간인 기념관은 역사성을 중심으로 정체성을 가미한 공간이어야 한다. 대표적으로 1980년대 일본의 국정교과서 왜곡에 대응하면서 민족적, 정치적 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해 설립된 독립기념관(1987)은 천안 흑성산 자락에 자리 잡았다. 인근에 3.1운동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유관순 열사 관련 유적들이 산재했던 것이 선정 이유 중의 하나다. 우리의 독립기념관보다 1년 늦게 문을 연 프랑스의 캉 기념관(Mémorial de Caen)은 노르망디 레지옹 칼바도스 데파르트망의 중세도시 캉에 위치해 있다. 이 기념관은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그리고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세계 각지의 전쟁들과 관계된 문헌, 사진, 유물, 서적, 영상 등이 진열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전쟁으로 인한 참상을 보여주는 가상 영화와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독특한 예술품들이 인상적이다. 다른 전쟁 기념관들이 주로 연합군의 승리에 초점을 맞추는 전시를 하는데 반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물질적·정신적 피해와 수많은 사망자들의 안타까운 희생을 기리는 내용의 전시회를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평화 기념관(Mémorial pour la Paix)’으로 불리기도 한다. 나치 치하 독일의 유대인 학살 반성과 희생자 추모를 위해 설립된 베를린 국립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60주년을 맞아 2005년 5월 10일 공식 오픈했다. 이 기념관에는 나치 하의 독일이 유대인들을 살해했던 것 등에 대한 각종 자료가 보관돼 있다. ‘살해당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이라는 공식 명칭을 가진 이 기념관은 최고 4.7m인 다양한 높이의 회색 콘크리트 기둥 2711개로 이루어져 가까이에서 보면 단순한 기둥들의 조합에 불과하지만 멀리서 보면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의 시신이 안치된 묘비가 물결치는 것처럼 보인다. 기념관은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정부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의 집무실 및 지하벙커 인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로 옆이 냉전과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있던 자리다. 이처럼 기념관들이 들어선 지역들은 3.1만세운동 핵심인물, 2차세계대전의 전환점이 되는 노르망디 상륙, 그리고 히틀러와 괴벨스의 집무실 등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현재의 사람들이 미래 세대에게 물려주려 한 ‘기억’을 상징화하고 그것을 ‘기념’함으로써 일정한 목표를 달성하려는 것이다. 충남은 대한민국과 운명을 같이 같이하며 격동의 세월을 지내왔다. 특히 ‘충절의 고장’으로 불리며 국난을 당해 선열들의 피와 땀으로 오늘을 이루어낸 지역이다. 임진왜란은 물론이고 대한제국말 일제 침략기에 충남에서 의병이 출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충남의 의병들에 대한 역사성과 정체성 그리고 상징성이 도드라진 충남에 개인기념관이자 사우인 수당기념관을 제외하고 제대로 된 의병기념관은 없다. 이제 범 도민의 의지를 담아 충남의병기념관을 설립해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 충남도는 의병이 지닌 의미와 역사성, 충남의 정체성, 그리고 지역의 상징성을 살릴 수 있는 충남의병기념관을 건립해야 한다. 최근 충남의병기념관 건립 위치를 놓고 지역 간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자칫 국난을 당해 지역과 신분과 학파를 떠나 하나로 뭉쳐 자신을 희생한 무명의 의병들에게 무엇이라 말을 할 수 있을까. 충남도는 충남의병을 상징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며 역사성을 살릴 수 있는 지역에 의병기념관이 들어서야 한다는 도민들의 의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 ※ 이 기사는 호서역사문화연구원 이명우 원장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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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흠 “대통령 공약, 공모로 진행해선 안 돼”[시사픽] 김태흠 충남도지사가 지역 관련 대통령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가 공모로 진행되지 않도록 적극 대응해 줄 것을 주문했다. 김 지사는 19일 도청 중회의실에서 연 제25차 실국원장회의를 통해 "지난주 우리 도가 국립경찰병원 분원 유치에 성공했다”라며 함께 힘을 모아 준 220만 도민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김 지사는 이어 "국립경찰병원 분원은 대통령 공약사항이므로 공모로 진행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육군사관학교와 국립치의학연구원구원 유치, 충남혁신도시 공공기관 이전 등 남은 대통령 공약 과제는 이미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공모로 진행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김 지사는 "대통령께 이 부분을 강력 건의하겠지만, 각 실국에서도 이를 인지하고 적극 대응해 줄 것”을 당부했다. 김 지사는 또 "우리 도 자살률은 10만 명 당 32.2명으로 전년 34.7명 대비 2.5명 감소했으나 여전히 높은 상황”이라며 자살 예방을 위한 정책 발굴을 위해 함께 고민해 달라고 말했다. 김 지사는 이와 함께 최근 한 일간지의 고독사 관련 시리즈 보도를 언급하며 "우리 도 역시 고독사가 많은 만큼, 이 지표를 낮추는 방향도 강구하라”고 밝혔다. 최근 대설‧한파 등 기상 상황과 관련해서는 "결빙 취약 지역 사전 제설, 적설 취약 구조물 등 예찰 활동 강화로 일상생활에 불편함에 없도록 행정력을 집중해 줄 것”을 주문했다. 국회에 계류 중인 내년 예산안에 대해서는 "국회 심의 과정에서 많은 예산을 확보했으나, 여야 합의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지켜보고 대응해 달라”고 말했다. 김 지사는 이밖에 △대전-보령 연결 포함 충청권 순환고속도로 건설 4개 시도 협의 및 건의 △학교급식 수주·발주 상황 점검 △내포신도시 시외버스 건설 민간-공공 투트랙 검토 △용봉산·수암산·도청사와 연계된 내포신도시 홍예공원 명품화 사업 추진 등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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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지역의 역사적 의병 기억 되살리고 미래세대에 물려줄 공간 필요 ➄[시사픽] 충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1.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➀) 4-2.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➁) 4-3.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➂)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충남에서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목숨을 걸고 창의 한지 1세기가 훌쩍 넘어섰다. 을미창의(1895년)로부터 127년, 병오의진(1906년)이 펼쳐진 해로부터 116년이 흘렀으며 충남 각지에서 의병들이 해외로 이주해 항일운동을 이어간지도 112년이 지났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선열들이 피흘려 지키려 했던 파편들을 대부분 역사교과서를 통해 접할 수 밖에 없다. 이유는 아직까지 의롭게 일어섰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공간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얼마 전 개최됐던 내포문화진흥포럼에서 발표됐던 자료에 따르면 독립유공자가 전체 17,285명으로 출신지역별로 분포로 북한 및 해외유공자 6019명을 제외하면 11,266명이 남한 내에서 활동했다. 전체 독립유공자 가운데 의병은 3.1운동(5,991명)과 해외운동(3,564명) 다음으로 많은 2709명(15.67%)이며 전국 독립 관련 70개 기념관 가운데 의병 관련 기념관은 8개(11.43%)로 집계됐다. 이들 8개 기념관도 제천과 청송을 제외하면 나머지 6곳은 개인기념관에 불과하다. 심지어 충남에는 이 같은 기념관조차 단 한곳도 없다. 예산에 수당 이남규 선생의 기념관이 있으나 의병기념관보다는 독립운동가 개인기념관으로 분류된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을미의병과 병오의병은 우리 의병사의 한 획을 그은 사건들이다. 특히 병오의병은 이후 발생한 정미의병의 효시가 되는 사건이자 의병사에서 가장 처절하고 규모가 컸던 투쟁의 역사이다. 현재 국내 기념관 70곳 가운데 52개소가 개인기념관이다. 그동안 기념관은 지역단위나 중앙의 사건 혹은 대주제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주로 개인 활동을 위주로 설립됐다. 이런 이유로 의병기념관 역시 몇몇 의병장들을 부각시킨 기념관이 대부분이다. 지역을 단위로 설립된 제천이나 청송 의병기념관도 의병장인 이강년과 유인석, 허위 등 지역의병장과 결합된 기념관이다. 앞서 기획 4편 ➁와 ➂편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의병은 의병장을 중심으로 거의를 하기도 하지만 다수의 이름 없는 인물들이 충절의 정신으로 일어난 자발적 거병이다. 충남의 의병활동도 을미의병의 경우 유림의 대의에서 시작했지만 병오의병은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지역과 학연, 신분을 구별치 않고 참여했다. 그런 의미로 충남의 의병기념관은 개인기념관 형태보다 사건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적 구성이 필요하다. 충남을 비롯 의병 활동이 비교적 활발했던 전남이나 경기도의 경우도 의병기념관이 전무한 실정으로 의병에 대한 기억이나 기념이 활발하지 못하다. 전국 8개소의 의병기념관도 개인 추모 기능이 강화된 사우에 부설된 소규모 기념관이 대부분이다. 앞서 포럼에서도 지역의 의병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시민들에게 기억을 각인시키고 역사를 재생하는데 특정 개인사에 그치는 한계가 있어 역사적 주제나 지역단위의 의병기념관 설립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의병기념관이 강원 1개소, 충북 1개소, 전북 3개소, 경북 3개소에 설립되어 있는 반면, 충남에는 전무하다. 위 지역들 못지않게 홍성, 당진 등 충남 여러 지역에서 치열한 의병전쟁이 전개되었음에도 이 역사를 지역공동체 구성원들과 공유할 수 있는, 대중의 기억으로 되살릴 수 있는 기념관이 없는 실정이다. 2017년 기준 대한민국의병도시협의회 참여 지방자치단체는 충남 아산시, 당진시, 금산군, 청양군, 홍성군을 비롯 서울 성북구, 인천 남구, 울산 북구, 광주 광산구, 대전 유성구 경기 안산시, 이천시, 가평군 강원 영월군, 횡성군 충북 제천시, 충주시, 단양군, 보은군, 증평군 경북 경주시, 영주시, 문경시, 청송군, 봉화군, 울릉군 경남 진주시 전북 완주군, 무주군, 고창군 전남 나주시, 광양시, 담양군, 구례군, 보성군, 영암군 등 36곳이다. 물론 이들 지역뿐 아니라 의병 활동이 전국적으로 활발히 이루어졌다. 지자체마다 상황은 다르겠지만 적지 않은 지자체가 어떤 이유에서 인지 의병도시협의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역사는 순회한다. 우리는 지역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지역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 기억을 되살리고 이를 미래세대에 물려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자료를 발굴, 수집하고 그것을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역사를 재생산하고, 그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해야 한다. 이 기억과 기념을 위해 지역내 공공기념관은 필수적이다. 기념관을 통해 지역주민들이 역사를 마주하며 자긍심을 갖고 현시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이 지역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선조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유산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공공시설로서 기념관은 지역사회에 문화적, 교육적 책임을 갖고 기억과 기념의 책무를 수행해 나아가야 한다. 기념관은 전시, 프로그램, 행사, 축제 등 기념관에서 펼칠 수 있는 다양한 ‘사업’을 통해 지역 공동체를 통합하고 지역 정체성과 연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또 지역에 산재한 기억의 공간과 장소,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하나로 연계하고 지원할 수 있는 센터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기념관의 역할을 규정해야 할 것이다. 특히 기념관의 독자적인 존립이 아니라 기념관을 중심으로 지역의 상징성이 드러나고 확산될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대다수 기념관들은 설립이후 무관심으로 설립 취지를 살리지 못해 상징성마저 주민들의 기억속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충절의 고장 충남’이라는 정체성을 살려 국가 존망의 위기에서 분연히 일어섰던 충남 의병들의 실태를 토대로 이들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공간인 기념관의 설립은 물론 향후 이를 통해 역사의 재조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향후 충남의병기념관 설립을 위해 지속가능한 장기계획이 필요하다. 기념관 운영에 필요한 조직 구성, 직원 배치, 연구계획, 사업계획, 중장기 예산투입 계획, 중장기 발전계획 등을 관련 법률이나 조례로 명시하고 개관 후 법률적 근거에 의해 흔들림 없이 운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 ※ 이 기사는 호서역사문화연구원 이명우 원장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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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흠 지사 “사립유·어린이집 균형 맞출 것”[시사픽] 김태흠 충남도지사가 내년 민간어린이집에 대한 지원을 통해 사립유치원과 어린이집의 균형을 맞추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 지사는 12일 도청 상황실에서 열린 제24차 실국원장회의에서 "사립유치원에 지원했던 63억원에 추가로 63억원을 보태서 총 126억원을 어린이집에 지원하겠다”며 "이를 통해 사립유치원과 민간어린이집의 균형을 맞추겠다는게 도의 방침이고 저의 결정”이라고 강조했다. 김 지사는 유아교육과 보육의 통합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사립유치원은 교육부와 교육청이, 어린이집은 보건복지부와 지자체가 관할하면서 발생한 비효율적인 부분을 개선하겠다는 입장이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누리과정 20%를 제외한 부족한 부분을 지방정부에서 해결해야 하는데, 교육청은 소관인 사립유치원만 지원하는 반면, 도는 어린이집에 대한 지원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에서 사립유치원까지 지원해 왔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는 학부모들은 사립유치원과 달리 그동안 10만원 정도를 부담하는 불균형이 발생했다. 김 지사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만 3-5세 유아나 사립유치원에 다니는 만 3-5세 유아나 똑같은 대한민국 어린이이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며 "교육청은 사립유치원만 관할한다고 해도 교육청 입장에서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은 대한민국의 아이들이 아닌 것이냐”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무상교육을 한다면 모든 어린이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행정기관의 책무라고 생각한다”며 "이런 상황인데도 도가 사립유치원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는 것이 마치 모든 교육비를 중단하는 것처럼 잘못된 논리를 펼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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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충절의 고장 충남에 있어야 할 의병기념관 ➃-3"그들은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이 의병이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살겠지만 다행히 조선이 훗날까지 살아남아 유구히 흐른다면 역사에 그 이름 한 줄이면 된다.” [시사픽] 충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1.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➀) 4-2.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➁) 4-3.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➂)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그들은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이 의병이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살겠지만 다행히 조선이 훗날까지 살아남아 유구히 흐른다면 역사에 그 이름 한 줄이면 된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의병으로 나오는 장승구(장포수)역의 최무성이 제자이자 의병인 주인공 고애신역 김태리에게 한 말이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스승이자 의병장인 장포수처럼 병오의병(1906)이전까지 의병들이 주로 유학자나 전직관료들이 중심이었다면 그 이후 의병들은 특정계층에서 벗어나 실전 중심의 의병으로 변화한다. 홍주의병을 주도한 이는 김복한과 이설이었으며 전·현직 관료는 물론 관군·향리·농민·보부상까지 참여하였다. 이들은 학통·지연·혈연 등의 연고로 조직되어 점차 신분·당파·학파를 초월하는 범민족적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이는 김복한의 ‘사공(事功)’의 실천결과로 볼 수 있다. 사공(事功)은 도학적인 명분만을 내세우지 않고 국운회복을 위해서 어떤 수단이라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상으로, 그 사례는 명성황후의 혈족인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계파가 다른 화서학파의 최익현과 연합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실제 김복한은 "사공의 실천은 스승이었던 남당이 가장 높은 경지에 자리했다”는 자부심으로 자신이 직접 실천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공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김복한은 1903년 임공우에게 보낸 서한에서 사공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사공은 왕성장미(往聖將微)를 잇는 것이고, 전현미발(前賢未發)의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며, 제유의 득실을 분별하는 것으로, 전통・권위에 반하는 이단의 그릇됨을 멀리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를 실천한 자는 남당 한원진 한분이다.”라고 하였다. 결국 유림계의 의병항쟁은 성리학적 명분이 아닌 국권회복을 위한 근대적 관점의 항일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제에 항거한 국권회복 운동은 국가에 대한 충절의 정신이다. 특히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은 군인들로 하여금 의병에 적극 가담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또 의병활동도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병오의병 이후 대의명분보다 실질적인 군사활동으로 변모한다. 충청도 의병 가운데 병오의병 이후를 대표할 만한 분이 을미의병과 병오의병에 모두 참가했던 이세영 의병장이다. 고광(古狂) 이세영 선생(李世永 1869~1938)의 부친은 오늘날의 경호처 차장이라 할 수 있는 용호영 내금위장 출신 이민하(李敏夏)다. 이세영 선생은 병인양요(1866)때 정족산성 수성장으로 공을 세운 양헌수(1816~1888)에게서 배웠다. 그의 스승인 양헌수는 화서 이항로의 문인으로 무과에 급제해 병인양요에서 승리했으며 삼군부사, 공조판서, 독련사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이세영 선생은 20세인 1889년 육영공원에 입학했고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이봉학(李鳳學)과 향리인 청양에서 유회(儒會)를 설립, 스스로 약장(約長)이 되어 지방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1895년 홍주에서 김복한(金福漢)을 의병장으로 이설(李偰), 이상린(李相麟), 안병찬, 이봉학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찰사 이승우의 간계로 패퇴하여 12월 4일 김복한 등 23명의 동지가 붙잡혔다. 이때 김복한의 명에 따라 공주로 의병을 모집하러 갔던 이세영 선생은 홍주의병과 밖에서 응원하던 청양군수 정인희와 김정하·이병승 등과 12월 6일 정산에 진을 치고, 12월 7일 공주 방면으로 진격해 철마정(鐵馬汀) 일대에서 공주부의 구완희 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전투에서 패한 선생은 홍산(鴻山)으로 피신하였다가 이듬해 아관파천(1896) 후 황재현·이관·김홍제 등과 1896년 2월 남포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 뒤 군주사(軍主事)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97년 대한제국군에 입대해 육군 참위(參尉), 1899년 부위(副尉), 1902년 정위(正尉)·헌병대장서리를 지냈다. 1904년 낙향하였으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종식(閔宗植)·채광묵(蔡光默) 등과 함께 의병봉기를 모의하였다. 홍주의진에서 의병장 민종식의 참모장으로 활약하였으나, 홍주성에서 패하여 붙잡혀 황주로 종신 유배되었다가, 1907년 철도(鐵島)로 이배된 후에 풀려났다. 같은 해 독립의군부 충청·전라·경상도 등 3도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08년 동생 이창영(李昌永)과 성명학교(誠明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고, 이듬해에 대한협회 은산지회(殷山支會)를 조직, 항일활동을 하였다. 1913년 3월 독립의군부 함경·평안·황해도의 3도사령으로 활약하였고, 그해 6월 만주로 망명,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소장을 맡았고, 신흥강습소가 신흥중학교로 이름을 바꾼 뒤인 1917년 11월에는 신흥중학교 교장을 맡았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참모부 차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5월 다시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1922년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에 참여하여 군사부장, 10월에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군사위원장이 되어 재만주 독립군의 최고 영도자가 되었다. 1930년 7월 강구우(姜九禹) 등과 조선혁명당 제1지부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을미 홍주의병에 참여했던 충남 공주 우강 출생 만오(晩悟) 이상린(1856~1946) 선생은 간재 (艮齋) 전우(田愚 1841~1922)문인으로 간재학파 대부분의 문인들과는 달리 의병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이다. 이상린 선생은 음서로 천거되어 제천서 군서기관으로 지냈으나 퇴임하고 홍주의병에 참여한 뒤 1905년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유동희, 이봉학 등과 함께 상경하여 궁문 밖에서 을사5조약을 무효화 할 것을 상주하였다. 그 후 국내에서의 의병운동이 한계에 달하자 북간도(北間島)로 망명하여 독립군 군관학교(軍官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선생은 함자를 상린에서 상규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전국의 유림이 참여한 인도공의소는 선생이 대표를 맡아 파리장서에 서명한 전양진·백관형·최중식을 비롯하여 유준근·이길성·황일성·오석우·이내수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 인도공의소의 목적은 규칙 제2조에서 밝히고 있듯이 "인도상 윤리를 천명하야 세계를 작신”함에 있었다. 규칙 제3조에 의하면, 공의소의 본부는 경성에 두기로 하였으나 홍성이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창립 후 인도공의소의 활동은 미미했다. 그러자 홍성의 유림들은 1927년 선생을 회장으로 유교부식회를 설립해 인도공의소의 활동을 이어갔다. 유교부식회는 인도공의소의 설립자들이 주축이 되어 "유교사상을 부흥하고 시대에 적합한 충의심을 앙양하여 새로운 윤리관을 확립”하기 위하여 1927년 홍성에서 조직되었다. 발기인은 지산 김복한 선생의 장자인 김은동을 비롯하여 오석우·전용욱·최중식·황일성·이영규·김노동·최명용·김경태·이우직·정태복·김익한 등이었다. 유교부식회의 주요 활동으로는 정기강연회 실시와 그리고 태안․청양․공주 등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여 유교사상의 보급과 충의정신의 고양에 힘썼다. 한편 윤봉길(1908 ~ 1932)도 유교부식회 회원으로 전용욱의 가르침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전용욱은 파리장서에 서명한 전양진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특히 유교부식회의 강학부를 맡아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는데, 이때 윤봉길이 유교부식회에 가입하여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병오의병 이후 충남지역 의병은 홍주는 물론 공주, 아산 등 거의 전 지역에 걸쳐 전개되었다. 서산과 당진지역에서는 정주원 의병의 활동이 돋보인다. 당진 출신인 정주원은 1907년 8월 죽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서용범의 권유를 받고 그 부대에 가입하여 부장으로 100~150명을 인솔하며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 후 용인군 굴암 등지에서 의병을 초모하고 경기, 충남지역의 의병연합체인 13진 창의소 총대장에 추대되어 경기도 죽산·양지·수원·안성 지역과 충청도 당진·서산 등지를 배로 이동하면서 일본경찰서를 공격하고 우편체송인을 공격하는 등의 활동을 하는 외에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세력과 의병을 고발하는 자들을 처단하였다. 당진지역에선 소난지도에서 의병과 일본경찰대와의 전투는 1908년 3월 15일 있었다. 소난지도 의병은 홍성경찰서에서 파견된 경찰대와의 전투에서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동쪽의 해안 끝까지 밀렸으며 백여 명의 의병이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일본경찰대는 의병으로부터 노획한 다수의 식량에 석유를 끼얹고 소각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홍주의병 이후 차령산맥의 줄기를 타고 가야산, 덕숭산, 용봉산, 칠갑산, 비봉산, 오서산, 성주산 등이 이어져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은 의병의 게릴라식 활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지역에선 보령 출신으로는 김석원, 박일복, 박정문, 성주경, 오경춘, 윤창영, 이규상, 이종갑, 이종국, 장석홍, 최정보, 한엇동 등이 있다. 서천 출신은 김삼석, 김정도, 백치서, 유형식, 이장준, 최봉석 등 6명, 홍성 출신은 윤경구, 이필봉 등, 청양 출신은 김순보, 이규하, 이소선 등, 그리고 예산 출신은 차치명 등이 확인된다. 을미와 병오년 이전 의병 활동이 미미했던 천안과 아산 그리고 공주와 부여, 논산, 금산 등에서도 1907년 군대 해산이후 의병항전이 활발했다. 천안에선 목천을 중심으로 광덕산 등 산악지역과 충북 경계지역에서 천안 출신의 신영칠, 이정구 등과 아산 출신의 서병림, 이규남, 이준영 등의 활약이 확인된다, 또 계룡산 주변인 공주와 논산 지역, 그리고 전북과 산악지대로 경계하고 있는 금산 지역에서는 공주 출신의 강덕보, 노성삼, 노원섭, 노치흠, 이덕경, 이사건, 이원선, 이원오, 이춘성, 이학현, 장남일, 최경휴 등 부여 출신의 권운택, 김광선, 김판돈, 신봉만, 이덕현, 이박원, 이성택, 정용운, 한기안, 한사용, 한성수, 한학삼 등 논산 출신의 김광옥, 김말출, 김성천, 김운서, 김원중, 배을룡, 신광삼, 윤치담, 이규철, 이창규 등 금산 출신의 강이봉, 김백원, 김부개, 김진철, 방치경, 이향운, 임해준, 장선군, 장한갑, 최점록 등이 의병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주로 산속에 근거지를 두고 수십 명 단위의 소규모 의병부대를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1909년 10월 이후 일제의 대규모 탄압이 본격화하면서 더욱 소부대 단위의 활동을 전개했지만 점차 소멸되었고 의병들은 항전의 무대를 간도 등 해외로 옮기거나 국민 교화를 위한 교육으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 ( ※ 이 기사는 호서역사문화연구원 이명우 원장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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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교 천안시체육회장, 재선 도전[시사픽] 한남교 민선 1기 천안시체육회장이 민선 2기 재선에 도전한다. 한 회장은 28일 천안시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민선 1기 체육회가 체육의 토대를 다진 기간이라면 민선 2기 체육회는 추진 중인 정책을 구체화해 완성하는 시기가 될 것”이라며 도전의지를 밝혔다. 이어 "그동안 쌓아온 풍부한 경험과 차별화된 전문성을 바탕으로 체육복지시대를 활짝 열어 시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겠다”며 "정치와 체육의 분리라는 민선 체육회의 출범 취지에 걸맞게 앞으로도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면서 특수법인으로서 진정한 체육자치를 실현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체육회 전문성과 경쟁력 극대화 ▲사무국 개편으로 체육인 권익증진 앞장 ▲생활체육 인프라 확충 ▲전국규모 대회 유치로 스포츠 도시 위상 제고 및 지역경제 활성화 ▲60개 회원종목단체의 체육행사 개최 예산 확대 ▲종목단체간 정보 공유·소통 사무공간 확보 ▲전문·생활체육 균형발전 시스템 재정비 ▲체육꿈나무 발굴과 지역 스포츠인재 육성 제도 도입 ▲안정적 체육예산 확보 ▲중장기적 자체 수익 창출 방안 수립 등을 민선 2기 주요정책으로 제시했다. 또 시민들과 체육동호인들이 가까운 곳에서 편안하게 운동하면서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올해 처음으로 개최한 천안 이봉주마라톤대회를 내년부터 풀코스마라톤대회로 준비하고 향후 세계적 마라톤대회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 회장은 "초등학교 운동선수로 활동할 때부터 오랫동안 체육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체육인으로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체육현장을 떠나본 적이 없다”며 "어느 누구보다 천안체육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당면한 체육현안을 잘 풀어 나갈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초대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코로나19라는 악재를 만나 계획했던 일들을 모두 펼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며 "이제 민선 2기 체육회장 도전을 통해 민선 1기에 뿌린 씨앗이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남은 열정을 모두 쏟아 내겠다”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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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충절의 고장 충남에 있어야 할 의병기념관 ➃-2"불의하게 존속하는 것은 의롭게 망하는 것만 못하고, 불의하게 사는 것은 의롭게 죽는 것만 못하옵니다. 더욱이 의를 지킨다고 꼭 망하고 죽는 것이 아니고, 불의하다고 꼭 존속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시사픽] 충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1.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①) 4-2.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②) 4-3.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③)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불의하게 존속하는 것은 의롭게 망하는 것만 못하고, 불의하게 사는 것은 의롭게 죽는 것만 못하옵니다. 더욱이 의를 지킨다고 꼭 망하고 죽는 것이 아니고, 불의하다고 꼭 존속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영흥부사로 있던 수당 이남규 선생(1855~1907)이 역적을 토벌할 것을 상소한 상소문 가운데 일부이다. 그는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향리인 예산으로 돌아왔다. 이후 중추원의관과 궁내부특진관을 지냈지만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홍주의진에 참여했다. 일본군의 반격으로 홍주성이 떨어지자 민종식 선생을 숨겨 주고 재기를 도모하다 일진회원의 밀고로 체포되어 공주옥에 투옥되었다가 서울로 압송 중에 일본의 회유에 저항하자 온양 평촌 냇가에서 아들 이충구와 피살되었다. 수당의 일가는 수당을 비롯 아들 충구와 손자 승복 등 3대가 모두 국립대전현충원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으며 증손자인 장원도 6.25 당시 소대장으로 근무 중 전사해 서울국립현충원에 안장되는 등 4대가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또 수당의 종형제인 춘당 이용규는 1906년 매부인 민종식 선생이 의병을 일으킬 때 의병진 편성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특히 1차 의진 이후 충남 남부와 전북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해 홍주의진에 큰 힘을 보탰다. 민종식의 2차봉기 당시 참모로 활약하고 5월 31일 홍주성 공방전에서 의병진이 무너진 뒤 탈출하여 변장하고 다니다가, 7월에는 청양에서 군사를 수습하여 400명의 병력으로 부여·노성을 지나 연산에 이르러 왜병과 교전하였으나 패하였다. 그 뒤 예산지방을 중심으로 재거사를 계획하던 중 10월 2일 일진회원의 밀고로 잡혀 평리원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907년 5월에 감형되어 6월 지도(智島)에 정배되었다가 11월에 풀려났다. 1909년 8월 청양 추치(抽峙)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켰으나 패하고, 1911년 10월에 옥천에서 전 승지 노병직(盧秉稷)·전 참의 장남기(張南基)·송순태(宋舜台) 등과 의병을 일으킬 논의를 하였으나 1912년 4월 밀고로 30명이 함께 잡혔다가 8월에 풀려났다. 그 뒤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7년 4월에 잡혀 통영 욕지도(欲知島)로 유배되었다. 1918년 12월 파리강화회담에 보낼 자료를 준비하던 중 예심원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뒤 1919년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충청남도 대의사(大義士)가 되었으며, 서울시민에게 보내는 취지문을 인쇄하여 배포하다가 잡혔다. 이후 행적은 불명이다. 구연(龜淵) 채광묵(1850~1906)은 충남 청양 출신으로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김복한, 이설, 박창로, 안병찬 등과 홍주의병을 일으켰으나 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로 실패하였다. 의병거사에 실패한 뒤 곧바로 상경하여 10여 차례에 걸쳐 토적상소(討賊上疏)를 올렸다. 조정에서는 채광묵의 기백에 감동하여 내부주사를 제수하였으나, 이를 고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박안기·이만식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또한, 1906년 4월 민종식과 의병대를 조직하여 수천 명으로 규합된 대의병진의 참모장으로 추대되어 홍주성을 점령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반격하는 일본군과 최후까지 접전하다가 아들 채규대와 함께 전사하였다. 규당(規堂) 안병찬(1854~1929)은 충남 청양 출신으로 아버지 안창식과 함께 을미의병에 참여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충청도 방면에서 제일 먼저 의거의 기치를 올린 홍성에서 아버지와 김복한·이설·임한주·이근주 등과 함께 홍주의진을 형성하여 참모로서 활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김복한과 이설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자신은 "대권이 모두 일인에게 넘어갔으니 천 장의 상소, 만 장의 공문서가 무슨 소용이랴.” 하면서 수천 명의 군사를 모아 1906년 청양 합천에서 접전하였다. 그러나 이미 왜병의 병참소가 사방에 널려 있고 일진회원이 곳곳에 있어 패전하였다. 그 해 2월 23일 박창로 등 40여 명과 함께 잡혔다가 4월 12일 풀려났다. 다시 의병을 모아 4월 16일 민종식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역을 맡았다. 홍주의진이 실패하자 자신은 간신히 피신했으나, 1907년 10월 1일 아우 안병림을 비롯 윤난수·이필한·조광희 등 5명과 함께 홍주의진과 관련된 인물을 조사할 때 공주로 압송되었다. 1919년에는 파리 만국강화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 사건으로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이은(二隱) 박창로(1846~1918)는 충남 예산 출신으로, 1896년과 1906년 두 차례에 걸쳐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 1895년 12월 2일 박창로는 안병찬 등과 함께 의병 수백 명을 인솔하고 홍주성으로 들어가 다음 날 김복한을 총수로 추대하고 홍주의병을 봉기하였다. 박창로는 1906년 3월에 봉기한 홍주의병에 다시 참여하였다. 민종식을 대장에 추대한 홍주의병은 1906년 3월 15일 예산의 광시장터에서 봉기하여 홍주성을 공격하였으나 관군의 저항에 막혀 후퇴하였다. 의진은 화성의 합천 일대에 진을 쳤으나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았고, 항전하던 박창로는 안병찬을 비롯한 2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구금되었다. 박창로는 풀려난 뒤 홍주의병에 다시 가담하여 홍주성 전투에 참여하였다. 홍주성 전투에서 패한 박창로는 민종식 등 지휘부와 함께 이남규의 집에서 재기를 추진하였으나, 일진회원의 밀고로 11월 17일 새벽 일본 헌병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감금되었다. 박창로는 공주감옥에서 풀려난 후 안병찬과 함께 정산의 칠갑산에서 항쟁을 지속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향리에서 은거하다가 1918년 사망하였다. 고광(古狂) 이세영(1869 ~ 1938)은 내금위장 이민하의 아들로 1895년 을미사변에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부여 홍산으로 도피, 이듬해 남포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가 패전했다. 1897년 육군 참위에 임명, 이듬해 부위가 되고 1902년 정위에 승진, 헌병대장 서리를 지낸 후 사직, 1904년 고향에 내려갔다.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종식,채광묵 등과 의병 모집을 협의, 1906년 민종식을 대장으로 삼고 참모장이 되어 홍주)에서 싸우다 피체, 종신 유형을 선고받고 황주에 유배, 그 후 철도에 이배되었다가 풀려 나왔다. 1908년 동생 창영과 성명 학교를 설립, 교장으로 후진 교육을 담당했고, 이듬해 대한 협회의 은산 지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벌였다. 국권침탈 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입교, 상교가 되었으며 신흥 무관 학교 교장, 통군부 사령관, 한교 교육회 이사장, 통의부 군사위원장을 역임, 상하이에 가서 임시 정부 참모부 차장을 지내고, 쓰촨성에서 병사했다. 홍주에서 일어났던 의병들은 을미사변은 물론 경오의병에도 대부분 참여했으며 의병 활동 중 사망하지 않은 경우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이후에도 국권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이들의 애국활동은 국내는 물론 해외로 이어졌으며 이세영의 경우처럼 무장투쟁의 초석이 되기도 했다. 또 자신뿐 아니라 대를 이어 국권회복에 나서는 충절을 이어갔다. ( ※ 이 기사는 호서역사문화연구원 이명우 원장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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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범 전 충남탁구협회장, 충남체육회장 출마 선언[시사픽] 김영범(67) 충남탁구협회 전 회장이 28일 제2대 충남체육회장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김 전 회장은 이날 충남도청 프레스센터에서 출마 기자회견을 통해 "생활체육 가맹단체 지원 확대와 엘리트 체육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과 지도자들의 권익과 복지 증진을 위해 회장 선거에 나섰다"고 밝혔다. 김 전 회장은 "우선 충남 체육발전을 위해서는 재정확보가 가장 중요하다”며 "충남도와 충남도의회와 긴밀한 협조와 대한체육회와의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예산확보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이어 "생활체육과 엘리트 체육, 학교체육이 골고루 발전하도록 균형 감각을 갖고 통합의 체육회를 만들겠다"며 "종목별 다양한 생활체육프로그램 개발과 선수 육성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충남체육회의 장기 비전도 제시했다. 먼저 충남스포츠재단을 설립 해 전문 체육인들의 경기력 향상을 지원하는 거점별 전문 체력 인 증센터 설치, 경기단체와 연계한 스포츠 정보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시군별 체육시설 확대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스포츠 지도자를 비롯한 체육관련 종사자들의 안정된 생활기반 보장을 위한 체육인 연금제도 실현도 김 전 회장이 제시하는 충남체육 미래 비전이다. 김 전 회장은 충남도체육회와 시·군 체육회, 종목 협회간 원활한 의사소통과 협력을 위한 회장의 사명과 역할을 강조했다. 우선 체육소통부서를 신설해 시·군 체육회 및 협회사업비 재정지원을 결정할 때 시·군 체육회와 종목협회 관계자들의 의견을 균형 있게 반영할 생각이라는 것. 이는 최소한 도체육회 인사들의 호불호에 따 라 시·군 체육회와 종목협회 재정지원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생각이다. 또한 2027년 충청4개 지자체에서 유치한 세계하계대학 경기대회 성공개최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준비하여 대한민국과 충청남도의 위 상를 높이고 충남 체육인의 저력을 보여 드린다고 다짐했다. 김 전 회장은 "체육인에게는 자부심을 도민에게는 건강과 행복을 주는 충남체육회가 될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며 "평생 체육인으로서 충남체육발전을 위해 아낌없이 노력했다는 긍지를 갖기 위해 충남체육회장에 도전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김영범 전 회장은 중·고교 시절 탁구선수로 활약한 엘리트 운동선수 출신이다. 고등학교에서 탁구 선수를 가르치는 지도자로도 활동했다. 사업가로서 충남 탁구협회를 19년간 이끌어 오면서 충남에서 많은 탁구 꿈나무들을 지원하고 스포츠 스타로의 성장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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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당진 고속도 2300억 늘려 재추진[시사픽] 사업비 초과로 멈춰섰던 대산-당진 고속도로 건설 사업이 타당성을 재검증 받고 다시 본궤도에 올라섰다. 충남도는 28일 대산-당진 고속도로 건설 사업이 기획재정부 재정사업평가위원회 타당성 재조사 심의를 최종 통과, 사업을 본격 추진한다고 밝혔다. 대산-당진 고속도로는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 대산석유화학단지 인근부터 당진시 사기소동 서해안고속도로 당진 분기점까지 25.36㎞를 4차로로 연결하는 사업이다. 이 고속도로는 2005년과 2009년 실시한 예비타당성조사에서 탈락한 뒤, 우여곡절 끝에 2016년 예타를 통과하며 사업을 본격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본 및 실시설계 과정에서 총 사업비가 6706억원에서 9122억원으로 2417억원이 증액되며 지난 3월부터 타당성 재검증 절차에 들어가게 됐다. 증액 내용은 대산나들목 신설 160억원 서산시 대산읍 운산리 마을 단절 방지 터널 설치 490억원 연약지반 처리 402억원 등이다. 이번 타당성 재조사에서 대산-당진 고속도로는 경제성이 0.95로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으나, 정책적 평가에서 0.5이상을 넘어 최종 통과됐다. 최종 통과 금액은 2367억원 증액된 9073억원으로 35%가 증가됐다. 이에 따라 대산-당진 고속도로는 내년 보상과 함께 공사를 시작, 2030년 개통할 예정이다. 도는 이 고속도로가 완공되면 날로 증가하고 있는 대산항 물동량을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대산항 물동량은 2009년 64716천톤에서 2021년 87708만톤으로 35% 증가했다. 대산과 당진을 잇는 국도29호선 교통량 역시 2009년 1일 1만 2904대에서 2020년 2만 846대로 62%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대산단지 입주 기업의 물류비용 절감, 교통사고 감소 등의 효과는 물론, 신규 산업단지 조성에 크게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대산단지는 현재, 1개의 국가산업단지와 6개의 일반산업단지, 4개의 개별공장이 조성되어 있고 4개의 일산업단지가 인허가 등의 절차가 진행 중이다. 대산단지에서 고속도로 진입까지 40㎞에 달하던 이동 거리는 2㎞로 크게 줄고 이동 시간 역시 1시간에서 1∼2분 사이로 크게 단축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는 출퇴근 시간대 국도 29호선 대산읍 구간 통과에만 1시간 이상 소요되고 있다. 이와 함께 상시 통행하던 대형 트럭과 위험화물이 고속도로를 이용하게 되면, 주민들이 사고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밖에 중부권 동서축 고속도로망이 서해안까지 직접 연결되며 도가 중점 추진 중인 가로림만 해상교량 건설, 국가 해양정원 조성, 대산항 국제 여객선 취항, 충남 서산공항 건설 등 각종 개발 사업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대산-당진 고속도로 건설 사업으로 인한 부가가치 유발액은 4024억원이며 건설 기간 동안 1만 412명, 운영 기간 동안 71명의 고용 창출 효과도 있을 것으로 예측됐다. 도는 이번 타당성 재조사 통과와 대산나들목 반영을 위해 김태흠 지사를 비롯한 지휘부가 기재부, 한국개발연구원, 국회 등을 수시로 방문하는 등 전방위 활동을 펼쳐왔다. 지난 21일 열린 재정사업평가 SOC 분과위원회에는 전형식 도 정무부지사가 직접 참석해 대산-당진 고속도로 건설 필요성을 설명하기도 했다. 홍순광 도 건설교통국장은 "대산석유화학단지에서 납부하는 국세만 연간 5조 원에 달하는 등 국가 발전 기여도가 크지만, 기반시설 지원은 크게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며 "타당성 재조사 통과로 다시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된 만큼, 공사 추진에 박차를 가해 지역 주민과 기업체가 하루라도 빨리 불편을 덜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재정사업평가위원회에서는 천안 성환∼평택 소사 간 국도 1호선 건설 사업도 타당성 재조사를 통과했다. 이 사업은 천안 성환읍과 경기 평택 소사동을 연결하는 4.62㎞ 규모 우회도로로 총 사업비가 당초 724억원에서 966억원으로 242억원 증액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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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삼범 충남도의원, 교육부문 풀뿌리자치대상 수상[시사픽] 충남도의회 편삼범 의원(보령2·국민의힘)이 지난 25일 충청지역신문협회에서 주관하는 ‘제14회 풀뿌리자치대상 자랑스런 충청인상’ 교육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이날 편 의원은 현장 중심의 의정활동을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학교 모델 방향을 제시하고 교육 균형발전을 도모하고, 지역과 사회·학교가 상생하는 교육 발전을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수상 소감에서 편 의원은 "교육 발전을 위해 노력한 도민 여러분과 함께 수상의 기쁨을 함께 나누겠다”며 "특히 언론에서 직접 선정해 준 상이라 더 그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이어 "항상 낮은 자세로 초심을 잃지 않고 도민의 행복과 교육 발전을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하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풀뿌리자치대상은 충청지역신문협회 탄생 34주년을 기념하고, 지역민들과 함께 충청지역의 밝은 내일을 위해 여러 분야에서 지역을 빛낸 인물 선정을 위해 매년 그 공로자를 수상·격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