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픽] 충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1.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➀)
4-2.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➁)
4-3.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➂)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그들은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이 의병이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살겠지만 다행히 조선이 훗날까지 살아남아 유구히 흐른다면 역사에 그 이름 한 줄이면 된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의병으로 나오는 장승구(장포수)역의 최무성이 제자이자 의병인 주인공 고애신역 김태리에게 한 말이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스승이자 의병장인 장포수처럼 병오의병(1906)이전까지 의병들이 주로 유학자나 전직관료들이 중심이었다면 그 이후 의병들은 특정계층에서 벗어나 실전 중심의 의병으로 변화한다.
홍주의병을 주도한 이는 김복한과 이설이었으며 전·현직 관료는 물론 관군·향리·농민·보부상까지 참여하였다. 이들은 학통·지연·혈연 등의 연고로 조직되어 점차 신분·당파·학파를 초월하는 범민족적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이는 김복한의 ‘사공(事功)’의 실천결과로 볼 수 있다.
사공(事功)은 도학적인 명분만을 내세우지 않고 국운회복을 위해서 어떤 수단이라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상으로, 그 사례는 명성황후의 혈족인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계파가 다른 화서학파의 최익현과 연합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실제 김복한은 "사공의 실천은 스승이었던 남당이 가장 높은 경지에 자리했다”는 자부심으로 자신이 직접 실천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공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김복한은 1903년 임공우에게 보낸 서한에서 사공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사공은 왕성장미(往聖將微)를 잇는 것이고, 전현미발(前賢未發)의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며, 제유의 득실을 분별하는 것으로, 전통・권위에 반하는 이단의 그릇됨을 멀리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를 실천한 자는 남당 한원진 한분이다.”라고 하였다.
결국 유림계의 의병항쟁은 성리학적 명분이 아닌 국권회복을 위한 근대적 관점의 항일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제에 항거한 국권회복 운동은 국가에 대한 충절의 정신이다.
특히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은 군인들로 하여금 의병에 적극 가담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또 의병활동도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병오의병 이후 대의명분보다 실질적인 군사활동으로 변모한다.
충청도 의병 가운데 병오의병 이후를 대표할 만한 분이 을미의병과 병오의병에 모두 참가했던 이세영 의병장이다.
고광(古狂) 이세영 선생(李世永 1869~1938)의 부친은 오늘날의 경호처 차장이라 할 수 있는 용호영 내금위장 출신 이민하(李敏夏)다.
이세영 선생은 병인양요(1866)때 정족산성 수성장으로 공을 세운 양헌수(1816~1888)에게서 배웠다. 그의 스승인 양헌수는 화서 이항로의 문인으로 무과에 급제해 병인양요에서 승리했으며 삼군부사, 공조판서, 독련사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이세영 선생은 20세인 1889년 육영공원에 입학했고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이봉학(李鳳學)과 향리인 청양에서 유회(儒會)를 설립, 스스로 약장(約長)이 되어 지방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1895년 홍주에서 김복한(金福漢)을 의병장으로 이설(李偰), 이상린(李相麟), 안병찬, 이봉학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찰사 이승우의 간계로 패퇴하여 12월 4일 김복한 등 23명의 동지가 붙잡혔다.
이때 김복한의 명에 따라 공주로 의병을 모집하러 갔던 이세영 선생은 홍주의병과 밖에서 응원하던 청양군수 정인희와 김정하·이병승 등과 12월 6일 정산에 진을 치고, 12월 7일 공주 방면으로 진격해 철마정(鐵馬汀) 일대에서 공주부의 구완희 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전투에서 패한 선생은 홍산(鴻山)으로 피신하였다가 이듬해 아관파천(1896) 후 황재현·이관·김홍제 등과 1896년 2월 남포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 뒤 군주사(軍主事)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97년 대한제국군에 입대해 육군 참위(參尉), 1899년 부위(副尉), 1902년 정위(正尉)·헌병대장서리를 지냈다.
1904년 낙향하였으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종식(閔宗植)·채광묵(蔡光默) 등과 함께 의병봉기를 모의하였다. 홍주의진에서 의병장 민종식의 참모장으로 활약하였으나, 홍주성에서 패하여 붙잡혀 황주로 종신 유배되었다가, 1907년 철도(鐵島)로 이배된 후에 풀려났다. 같은 해 독립의군부 충청·전라·경상도 등 3도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08년 동생 이창영(李昌永)과 성명학교(誠明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고, 이듬해에 대한협회 은산지회(殷山支會)를 조직, 항일활동을 하였다. 1913년 3월 독립의군부 함경·평안·황해도의 3도사령으로 활약하였고, 그해 6월 만주로 망명,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소장을 맡았고, 신흥강습소가 신흥중학교로 이름을 바꾼 뒤인 1917년 11월에는 신흥중학교 교장을 맡았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참모부 차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5월 다시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1922년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에 참여하여 군사부장, 10월에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군사위원장이 되어 재만주 독립군의 최고 영도자가 되었다.
1930년 7월 강구우(姜九禹) 등과 조선혁명당 제1지부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을미 홍주의병에 참여했던 충남 공주 우강 출생 만오(晩悟) 이상린(1856~1946) 선생은 간재 (艮齋) 전우(田愚 1841~1922)문인으로 간재학파 대부분의 문인들과는 달리 의병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이다.
이상린 선생은 음서로 천거되어 제천서 군서기관으로 지냈으나 퇴임하고 홍주의병에 참여한 뒤 1905년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유동희, 이봉학 등과 함께 상경하여 궁문 밖에서 을사5조약을 무효화 할 것을 상주하였다.
그 후 국내에서의 의병운동이 한계에 달하자 북간도(北間島)로 망명하여 독립군 군관학교(軍官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선생은 함자를 상린에서 상규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전국의 유림이 참여한 인도공의소는 선생이 대표를 맡아 파리장서에 서명한 전양진·백관형·최중식을 비롯하여 유준근·이길성·황일성·오석우·이내수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 인도공의소의 목적은 규칙 제2조에서 밝히고 있듯이 "인도상 윤리를 천명하야 세계를 작신”함에 있었다. 규칙 제3조에 의하면, 공의소의 본부는 경성에 두기로 하였으나 홍성이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창립 후 인도공의소의 활동은 미미했다. 그러자 홍성의 유림들은 1927년 선생을 회장으로 유교부식회를 설립해 인도공의소의 활동을 이어갔다.
유교부식회는 인도공의소의 설립자들이 주축이 되어 "유교사상을 부흥하고 시대에 적합한 충의심을 앙양하여 새로운 윤리관을 확립”하기 위하여 1927년 홍성에서 조직되었다. 발기인은 지산 김복한 선생의 장자인 김은동을 비롯하여 오석우·전용욱·최중식·황일성·이영규·김노동·최명용·김경태·이우직·정태복·김익한 등이었다.
유교부식회의 주요 활동으로는 정기강연회 실시와 그리고 태안․청양․공주 등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여 유교사상의 보급과 충의정신의 고양에 힘썼다.
한편 윤봉길(1908 ~ 1932)도 유교부식회 회원으로 전용욱의 가르침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전용욱은 파리장서에 서명한 전양진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특히 유교부식회의 강학부를 맡아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는데, 이때 윤봉길이 유교부식회에 가입하여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병오의병 이후 충남지역 의병은 홍주는 물론 공주, 아산 등 거의 전 지역에 걸쳐 전개되었다.
서산과 당진지역에서는 정주원 의병의 활동이 돋보인다. 당진 출신인 정주원은 1907년 8월 죽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서용범의 권유를 받고 그 부대에 가입하여 부장으로 100~150명을 인솔하며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 후 용인군 굴암 등지에서 의병을 초모하고 경기, 충남지역의 의병연합체인 13진 창의소 총대장에 추대되어 경기도 죽산·양지·수원·안성 지역과 충청도 당진·서산 등지를 배로 이동하면서 일본경찰서를 공격하고 우편체송인을 공격하는 등의 활동을 하는 외에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세력과 의병을 고발하는 자들을 처단하였다.
당진지역에선 소난지도에서 의병과 일본경찰대와의 전투는 1908년 3월 15일 있었다. 소난지도 의병은 홍성경찰서에서 파견된 경찰대와의 전투에서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동쪽의 해안 끝까지 밀렸으며 백여 명의 의병이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일본경찰대는 의병으로부터 노획한 다수의 식량에 석유를 끼얹고 소각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홍주의병 이후 차령산맥의 줄기를 타고 가야산, 덕숭산, 용봉산, 칠갑산, 비봉산, 오서산, 성주산 등이 이어져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은 의병의 게릴라식 활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지역에선 보령 출신으로는 김석원, 박일복, 박정문, 성주경, 오경춘, 윤창영, 이규상, 이종갑, 이종국, 장석홍, 최정보, 한엇동 등이 있다. 서천 출신은 김삼석, 김정도, 백치서, 유형식, 이장준, 최봉석 등 6명, 홍성 출신은 윤경구, 이필봉 등, 청양 출신은 김순보, 이규하, 이소선 등, 그리고 예산 출신은 차치명 등이 확인된다.
을미와 병오년 이전 의병 활동이 미미했던 천안과 아산 그리고 공주와 부여, 논산, 금산 등에서도 1907년 군대 해산이후 의병항전이 활발했다. 천안에선 목천을 중심으로 광덕산 등 산악지역과 충북 경계지역에서 천안 출신의 신영칠, 이정구 등과 아산 출신의 서병림, 이규남, 이준영 등의 활약이 확인된다,
또 계룡산 주변인 공주와 논산 지역, 그리고 전북과 산악지대로 경계하고 있는 금산 지역에서는 공주 출신의 강덕보, 노성삼, 노원섭, 노치흠, 이덕경, 이사건, 이원선, 이원오, 이춘성, 이학현, 장남일, 최경휴 등 부여 출신의 권운택, 김광선, 김판돈, 신봉만, 이덕현, 이박원, 이성택, 정용운, 한기안, 한사용, 한성수, 한학삼 등 논산 출신의 김광옥, 김말출, 김성천, 김운서, 김원중, 배을룡, 신광삼, 윤치담, 이규철, 이창규 등 금산 출신의 강이봉, 김백원, 김부개, 김진철, 방치경, 이향운, 임해준, 장선군, 장한갑, 최점록 등이 의병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주로 산속에 근거지를 두고 수십 명 단위의 소규모 의병부대를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1909년 10월 이후 일제의 대규모 탄압이 본격화하면서 더욱 소부대 단위의 활동을 전개했지만 점차 소멸되었고 의병들은 항전의 무대를 간도 등 해외로 옮기거나 국민 교화를 위한 교육으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
( ※ 이 기사는 호서역사문화연구원 이명우 원장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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