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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충절의 고장 충남에 있어야 할 의병기념관 ➃-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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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특집

[기획] 충절의 고장 충남에 있어야 할 의병기념관 ➃-2

불의하게 사는 것은 의롭게 죽는 것만 못하다
국권회복을 위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충절을 보여

"불의하게 존속하는 것은 의롭게 망하는 것만 못하고, 불의하게 사는 것은 의롭게 죽는 것만 못하옵니다. 더욱이 의를 지킨다고 꼭 망하고 죽는 것이 아니고, 불의하다고 꼭 존속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시사픽] 충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1.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①)

4-2.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②) 

4-3.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③)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불의하게 존속하는 것은 의롭게 망하는 것만 못하고, 불의하게 사는 것은 의롭게 죽는 것만 못하옵니다. 더욱이 의를 지킨다고 꼭 망하고 죽는 것이 아니고, 불의하다고 꼭 존속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영흥부사로 있던 수당 이남규 선생(1855~1907)이 역적을 토벌할 것을 상소한 상소문 가운데 일부이다. 그는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향리인 예산으로 돌아왔다.

 

이후 중추원의관과 궁내부특진관을 지냈지만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홍주의진에 참여했다.

 

일본군의 반격으로 홍주성이 떨어지자 민종식 선생을 숨겨 주고 재기를 도모하다 일진회원의 밀고로 체포되어 공주옥에 투옥되었다가 서울로 압송 중에 일본의 회유에 저항하자 온양 평촌 냇가에서 아들 이충구와 피살되었다. 수당의 일가는 수당을 비롯 아들 충구와 손자 승복 등 3대가 모두 국립대전현충원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으며 증손자인 장원도 6.25 당시 소대장으로 근무 중 전사해 서울국립현충원에 안장되는 등 4대가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또 수당의 종형제인 춘당 이용규는 1906년 매부인 민종식 선생이 의병을 일으킬 때 의병진 편성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특히 1차 의진 이후 충남 남부와 전북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해 홍주의진에 큰 힘을 보탰다.

 

민종식의 2차봉기 당시 참모로 활약하고 5월 31일 홍주성 공방전에서 의병진이 무너진 뒤 탈출하여 변장하고 다니다가, 7월에는 청양에서 군사를 수습하여 400명의 병력으로 부여·노성을 지나 연산에 이르러 왜병과 교전하였으나 패하였다. 그 뒤 예산지방을 중심으로 재거사를 계획하던 중 10월 2일 일진회원의 밀고로 잡혀 평리원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907년 5월에 감형되어 6월 지도(智島)에 정배되었다가 11월에 풀려났다.

 

1909년 8월 청양 추치(抽峙)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켰으나 패하고, 1911년 10월에 옥천에서 전 승지 노병직(盧秉稷)·전 참의 장남기(張南基)·송순태(宋舜台) 등과 의병을 일으킬 논의를 하였으나 1912년 4월 밀고로 30명이 함께 잡혔다가 8월에 풀려났다. 그 뒤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7년 4월에 잡혀 통영 욕지도(欲知島)로 유배되었다. 1918년 12월 파리강화회담에 보낼 자료를 준비하던 중 예심원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뒤 1919년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충청남도 대의사(大義士)가 되었으며, 서울시민에게 보내는 취지문을 인쇄하여 배포하다가 잡혔다. 이후 행적은 불명이다.

 

구연(龜淵) 채광묵(1850~1906)은 충남 청양 출신으로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김복한, 이설, 박창로, 안병찬 등과 홍주의병을 일으켰으나 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로 실패하였다.

 

의병거사에 실패한 뒤 곧바로 상경하여 10여 차례에 걸쳐 토적상소(討賊上疏)를 올렸다. 조정에서는 채광묵의 기백에 감동하여 내부주사를 제수하였으나, 이를 고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박안기·이만식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또한, 1906년 4월 민종식과 의병대를 조직하여 수천 명으로 규합된 대의병진의 참모장으로 추대되어 홍주성을 점령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반격하는 일본군과 최후까지 접전하다가 아들 채규대와 함께 전사하였다.

 

규당(規堂) 안병찬(1854~1929)은 충남 청양 출신으로 아버지 안창식과 함께 을미의병에 참여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충청도 방면에서 제일 먼저 의거의 기치를 올린 홍성에서 아버지와 김복한·이설·임한주·이근주 등과 함께 홍주의진을 형성하여 참모로서 활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김복한과 이설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자신은 "대권이 모두 일인에게 넘어갔으니 천 장의 상소, 만 장의 공문서가 무슨 소용이랴.” 하면서 수천 명의 군사를 모아 1906년 청양 합천에서 접전하였다. 그러나 이미 왜병의 병참소가 사방에 널려 있고 일진회원이 곳곳에 있어 패전하였다.

 

그 해 2월 23일 박창로 등 40여 명과 함께 잡혔다가 4월 12일 풀려났다. 다시 의병을 모아 4월 16일 민종식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역을 맡았다. 홍주의진이 실패하자 자신은 간신히 피신했으나, 1907년 10월 1일 아우 안병림을 비롯 윤난수·이필한·조광희 등 5명과 함께 홍주의진과 관련된 인물을 조사할 때 공주로 압송되었다. 1919년에는 파리 만국강화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 사건으로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이은(二隱) 박창로(1846~1918)는 충남 예산 출신으로, 1896년과 1906년 두 차례에 걸쳐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

 

1895년 12월 2일 박창로는 안병찬 등과 함께 의병 수백 명을 인솔하고 홍주성으로 들어가 다음 날 김복한을 총수로 추대하고 홍주의병을 봉기하였다.

 

박창로는 1906년 3월에 봉기한 홍주의병에 다시 참여하였다. 민종식을 대장에 추대한 홍주의병은 1906년 3월 15일 예산의 광시장터에서 봉기하여 홍주성을 공격하였으나 관군의 저항에 막혀 후퇴하였다. 의진은 화성의 합천 일대에 진을 쳤으나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았고, 항전하던 박창로는 안병찬을 비롯한 2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구금되었다. 박창로는 풀려난 뒤 홍주의병에 다시 가담하여 홍주성 전투에 참여하였다. 홍주성 전투에서 패한 박창로는 민종식 등 지휘부와 함께 이남규의 집에서 재기를 추진하였으나, 일진회원의 밀고로 11월 17일 새벽 일본 헌병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감금되었다.

 

박창로는 공주감옥에서 풀려난 후 안병찬과 함께 정산의 칠갑산에서 항쟁을 지속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향리에서 은거하다가 1918년 사망하였다.

 

고광(古狂) 이세영(1869 ~ 1938)은 내금위장 이민하의 아들로 1895년 을미사변에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부여 홍산으로 도피, 이듬해 남포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가 패전했다. 1897년 육군 참위에 임명, 이듬해 부위가 되고 1902년 정위에 승진, 헌병대장 서리를 지낸 후 사직, 1904년 고향에 내려갔다.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종식,채광묵 등과 의병 모집을 협의, 1906년 민종식을 대장으로 삼고 참모장이 되어 홍주)에서 싸우다 피체, 종신 유형을 선고받고 황주에 유배, 그 후 철도에 이배되었다가 풀려 나왔다. 1908년 동생 창영과 성명 학교를 설립, 교장으로 후진 교육을 담당했고, 이듬해 대한 협회의 은산 지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벌였다. 국권침탈 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입교, 상교가 되었으며 신흥 무관 학교 교장, 통군부 사령관, 한교 교육회 이사장, 통의부 군사위원장을 역임, 상하이에 가서 임시 정부 참모부 차장을 지내고, 쓰촨성에서 병사했다.

 

홍주에서 일어났던 의병들은 을미사변은 물론 경오의병에도 대부분 참여했으며 의병 활동 중 사망하지 않은 경우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이후에도 국권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이들의 애국활동은 국내는 물론 해외로 이어졌으며 이세영의 경우처럼 무장투쟁의 초석이 되기도 했다. 또 자신뿐 아니라 대를 이어 국권회복에 나서는 충절을 이어갔다.

 

 

( ※ 이 기사는 호서역사문화연구원 이명우 원장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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