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픽] 충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1.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①)
4-2.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②)
4-3.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③)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충남도의회는 올 11월 임시회에서 의병운동 기념사업 지원조례를 행정문화위원회에서 발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도의회는 지난달 이종화 의원(홍성2)과 방한일 의원(예산1)이 각각 의병운동 기념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를 대표 발의한 바 있다.
같은 내용의 조례를 지역을 달리한 의원들이 각각 발의한 것은 의병기념관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기념관의 설립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것이란 해석을 낳고 있다.
충남은 일찍이 임진왜란 당시는 물론 일제에 의한 경술국치를 당하기까지 매번 국가의 존망 위기에 의병들이 거의해 외세에 대항해 왔다.
임진왜란 이전 공주에서 계수제독관으로 부임해 제자들을 양성한 중봉 조헌 선생이 공주를 중심으로 자신의 제자를 비롯한 17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해 청주를 탈환하고 금산성으로 향하던 중 금산벌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700여명의 의사 순절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논산의 사계 김장생 선생은 정묘호란 당시 양호호소사로 의병을 모집해 당시 공주로 내려온 소현세자의 호위를 맡기도 했다.
조선말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살해되고 폐비가 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전 승지 지산 김복한 선생과 그의 내종형인 전 응교 복암 이설 선생 그리고 홍주 전교 안병찬 등이 홍주에서 결진해 의병을 일으켰다. 비록 3일만에 관찰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실패했지만 을미의병 가운데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거의였다.
지산 김복한 선생과 복암 이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등박문과 을사5적을 처단할 것 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옥고를 치렀고 후일 김복한 선생은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 사건을 주도했다.
을사늑약이후 홍주성을 점령했던 퇴초자 전 참판 민종식선생은 명성황후의 족손으로 아버지는 고종때 충청도 관찰사와 이조, 호조, 예조, 형조, 공조 판서를 두루 거친 민영상으로 명문출신이다.
그는 김복한, 이설 선생과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정산현(청양군 정산)에서 창의해 한때 홍주성을 함락시켰지만 일본군의 참전으로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이처럼 충남지역에서 활발한 의병 활동이 일어난 이유는 춘추대의에 입각한 선비정신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봉 조헌 선생이나 사계 김장생 선생은 물론 지산 김복한 선생이나 퇴초자 민종식 선생 등의 면면에서 보듯이 이들은 유학자로써 성리학의 근본인 춘추대의에 입각한 선비들이다.
특히 조선말 의병장인 지산 김복한 선생은 조선 후기 율곡과 우암의 학통을 이은 남당 한원진의 호론을 몸소 실천한 실천궁행의 유학자이다.
율곡학파의 정수가 사계 김장생-신독재 김집-우암 송시열-수암 권상하에서 남당 한원진을 거쳐 노론 벽파의 거두 김한록에 이르러 정쟁으로 세가 크게 줄었지만 홍성지역의 남당학파는 송능상-송환기-송치규를 거쳐 지산 김복한과 가학을 계승한 연재학파로 이어졌다.
남당학파와 연재학파의 거의(擧義)와 순절(殉節)은 존화양의(尊華攘夷)를 기본에 둔 위정척사(衛正斥邪)와 춘추대의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다.
또 지산 김복한 선생은 생전에 교육기관인 인지서와 인도공의소를 설립했고 사후 지산 선생의 인도공의소 정신을 이어 설립된 유교부식회는 민족정신과 항일운동을 매헌 윤봉길에게 전해 독립운동에 나선 윤의사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 ※ 이 기사는 호서역사문화연구원 이명우 원장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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