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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충절의 고장 충남에 있어야 할 의병기념관 ④-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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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특집

[기획] 충절의 고장 충남에 있어야 할 의병기념관 ④-1

민종식, 홍주성을 점령하고 충남의병의 기치를 세우다

홍주의병.jpg
홍주의병과 홍주성전투 / 제공=홍성군

 

"병오년 6월 18일 음산한 비가 내렸다. 우리 일행 9명은 흐느끼며 대궐을 나와 기차를 타기 위해 일본 병정을 따라서 남대문 밖으로 갔다. 전송하러 나온 벗들이 나라를 떠나는 회포와 더욱이 어디에 머무를 것인지 몰라 눈물을 흘리는 사이 기차는 출발했다. 눈앞에 펼쳐진 금수강산을 바라보니 또한 비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저녁 늦게 초량에 도착, 저녁밥을 먹은 후 세차게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배에 오르니, 끝없이 밀려오는 풍랑은 사람으로 하여금 현기증을 일으키게 한다.”


[시사픽] 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1.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①) 

4-2.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②)

4-3.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③)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병오년 6월 18일 음산한 비가 내렸다. 우리 일행 9명은 흐느끼며 대궐을 나와 기차를 타기 위해 일본 병정을 따라서 남대문 밖으로 갔다. 전송하러 나온 벗들이 나라를 떠나는 회포와 더욱이 어디에 머무를 것인지 몰라 눈물을 흘리는 사이 기차는 출발했다. 눈앞에 펼쳐진 금수강산을 바라보니 또한 비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저녁 늦게 초량에 도착, 저녁밥을 먹은 후 세차게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배에 오르니, 끝없이 밀려오는 풍랑은 사람으로 하여금 현기증을 일으키게 한다.”

 

병오년 홍주의진에 참여했다가 붙잡힌 뒤 일제에 의해 대마도로 유배를 떠나는 홍주9의사 가운데 한분이셨던 보령의 유병장 유준근 선생이 쓴 마도일기(馬島日記)의 한부분이다.

 

5월 19일 민종식의 홍주의병이 홍주성을 점령했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그달 31일 성이 함락되면서 80여 명의 의병이 순국하고 145명이 생포되었는데, 그중 80여명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6월 9일(음력 윤 4월 18일) 일본군사령부로 끌려갔던 의병들은 7월 말 70여 명이 석방되었지만, 홍주의진의 참모였던 남규진·문석환·신보균·신현두·안항식·유준근·이상두·이식·최상집 등 이른바 '홍주 9의사'는 대마도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들 중 남규진·신현두·유준근·이식 선생 등 4명의 의사는 일제에 의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고국산천을 떠나 적국인 대마도로 호송되는 선생의 쓰라린 심정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병오 홍주의진은 을사늑약(1905)이 체결되자 을미년(1895)에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지산 김복한 선생과 복암 이설 선생이 상경하여 을사5적과 일본인 하세가와 등을 척결할 것과 의병을 모집해 일본세력을 축출할 것 등을 상소했다. 이때 청양 정선에 거주하던 전 참판 민종식도 상경해 상소를 올리고자 이설에게 상소문 초안을 부탁하고 민영익과 민영휘 등을 만나 상의했으나 상소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니 그만두라는 그들의 만류와 김복한, 이설 등이 체포되고 상소문마저 압수됐다는 말을 듣고 다시 정산으로 돌아왔다.

 

민종식 선생은 낙향하여 의병 봉기를 계획했는데 마침 홍주 을미의병의 주도자로 홍주향교 전교를 맡고 있던 안병찬과 채광묵 등이 홍성·청양 일대의 유생들과 함께 의병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먼저 유림에서 최익현은 1906년 1월에 충남 노성(魯城) 궐리사(闕里祠)에서 원근의 유림을 모아 강연을 열고 시국의 절박함을 알리며 일치단결해서 국권회복에 동참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홍주와 청양의 유림에서 민종식을 응원(應援)으로 최익현을 맹주(盟主)하고 거의할 것을 요청했지만 최익현은 전북 태인으로 발길을 옮겨 그곳에서 거병하게 된다.

 

최익현 선생이 떠나자 유림은 민종식 선생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부탁하고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생은 의병의 총수 자리에 올랐다. 의병장에 오른 선생은 가산을 팔아 군자금 5만냥(2천원)을 마련하여 군수품으로 제공하고 1906년 3월15일 정산 천장리에서 거병했다.

 

민종식 선생과 홍주·청양의 지사들은 3월 17일 예산 광시 장터로 진군하고 다음날 의병들은 홍주성으로 진군했다. 이들은 홍주성 밖 하우령(지금의 홍성군 구항면과 홍성읍 우회도로의 경계지점)에 진을 쳤지만 관군의 저항으로 청양 화성 합천으로 물러나고 3월19일 새벽 공주진위대와 서울시위대 병력 200여명과 합천에서 마주해 전투에 들어갔다. 의병들은 화승총과 칼을 들고 싸웠지만 관군을 무찌르지 못하고 의병 수뇌부인 안병찬과 박창로를 비롯 수십 명이 체포되어 공주관찰부로 압송되고 말았다. 이때 압송된 안병찬 등은 수일 후 방면되어 다시 의병에 합류하게 된다.

 

1차 기병에 실패한 민종식은 5월 12일 흩어졌던 의병들을 모아 충남 홍산군 지티동 (현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에서 다시 국권회복의 기치를 들었다. 민종식의 처남인 이용규가 전라도에서 모집한 의병을 중심으로 민종식을 대장에 재추대하고 이튿날 서천읍에 이르니 의병은 1천여명으로 늘어났다. 다음날 비인을 점령했으며, 유준근 등 의병이 합류해 보령 남포성에서 5일 동안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에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치고 광천을 거쳐 결성으로 진군해 하루를 보내고 5월 19일 홍주로 들어가 삼신당리에서 일본군을 물리친 의병들은 마침내 홍주성을 점령하게 된다.

 

당시 상황을 황현의 매천야록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전 참판 민종식이 의병을 일으켜 홍주로 들어갔다. 종식은 판서 민영상의 아들로서 국변(명성황후의 살해)을 아프게 생각하여 가재를 풀어서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를 사들이니, 호서지방의 사민들은 추종하는 자가 날로 증가하였다. 남포·보령 제군을 습격하여 그 병기를 거두어들이고 순찰하는 일본군을 사로잡아 참수하고 5월 20일에 홍주로 들어갔다. 지난번 일본군은 홍주성은 족히 믿을 만하다 하여 포병 약간을 배치하고 대포 10여 문을 매설하였는데, 모두 민종식의 소유가 되었고, 부서별로 나누어 지키니, 명성과 위세가 몹시 왕성했다.”

 

매천 선생 역시 1910년 국난을 당하자 순절을 택한 선비였으니 그가 홍주의진을 보는 시각은 자명하다. 다만 매천은 직접 본 것을 기록하기보다는 전해들은 것을 기술했다는 점에서 홍주성 입성 날짜 등에 차이가 있다.

 

또 홍주의병의 홍주성 입성 상황을 홍순대는 해암사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홍주성으로 가는 도중에 광천장터에 살고 있는 왜놈 6명을 사로잡았다. 4월 26일(양력 5월 19일) 홍주 남산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의 병력은 5천여 명에 이르렀다. 마침 이날은 홍주 장날이기도 하였다. 오후 4시쯤 성을 함락하려고 하였으나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홍주성의 4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우리 진영의 아주 날쌘 병정 2명이 성에 들어갈 곳을 찾다가 하수구를 발견하고 거기로 들어가 4대문을 열었다. 드디어 홍주성은 함락되었다. 대문을 연 두 병정은 신천문과 천학순이었다. 의병들이 성안에 살고 있던 왜적을 잡으려 했으나 그들은 성이 무너지기 전에 이미 달아나 버렸다.”


이처럼 홍주의진은 마침내 홍주성을 무력으로 탈취했다. 

IMG_20221115_163215.jpg
홍주의사총

    

홍주성에서 도망친 일본군은 공주에서 병력을 지원 받았다. 일본군과 관군은 홍주성을 빼앗긴지 하루만에 반격을 해왔다. 하지만 민종식이 이끄는 홍주의병은 21일 수원 헌병 부대에서 파견된 헌병과 경찰 혼성부대를 격퇴하고, 24일에는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 부대와 공주 진위대에서 파견한 관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또 29일에는 체포한 일본인 3명과 일진회원 2명을 총살하였다.

 

일본군이 연이어 패배하고 전세가 의병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견을 명령하였다. 하세가와 사령관의 명령을 받은 일본군 보병 60연대의 대대장 다나까 소좌는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반개 소대 그리고 전주 수비대 1개 소대를 거느리고 30일 홍주성을 포위하였다.

 

일본군은 의병보다 화력이 우세하였으며 전투 경험이 많은 병사들이었다. 5월 31일 새벽 2시 반 일본군 기마병 폭발반이 동문을 폭파하였다. 이를 신호로 일본군 보병과 헌병대 그리고 경찰대가 기관총을 쏘며 성문 안으로 침입하였다. 또한 2중대 1소대와 4중대 1소대는 의병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그렇게 하여 31일 새벽 4시경 홍주성은 일본군에 의해 다시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기마병을 시켜 의병을 추격하여 사살하였다. 이때 양민들 역시 다수가 살해되었다.

 

미명의 새벽, 홍주성 동문이었던 조양문을 폭파하고 들이닥친 일본군은 닥치는 대로 살상을 저지르니 홍주성은 일시에 아비규환 속에 빠졌다. 민종식 선생을 비롯한 상당수의 의병들은 성 밖으로 몸을 피했으나 채광묵 부자를 비롯한 80여명의 의병들은 장렬한 최후를 맞았고, 생포된 의병이 145명이었으니, 홍주성을 점령한 지 13일째인 5월 31일이었다.

 

이날의 격렬한 전투에 대하여 대한매일신보 6월 15일자에는 "홍주군 정형을 들은 즉 일본 군대가 의병을 습격할 때 의병은 기미를 알고 흩어져 모두 제거하지 못하고 무고한 거주민을 남기지 않고 도륙하고 일로전쟁시 만주를 점령함과 같이 일본인민을 점차 이주케 할 계획이라 하니 한 사람의 무고한 백성을 죽이고 천하를 얻어도 사람들이 참지 못하는 바이거늘 하물며 한 주(州)의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고 한 성을 점령했으니 이를 가히 참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너무나 비참하고 눈물이 흘러내려 할 말을 잇지를 못하겠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매천야록’에는 "홍주 10리 안에는 밀과 보리가 모두 없어졌으니, 병마에 짓밟힌 바가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했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이날 포로로 잡힌 유준근·이식·신현두·남규진은 종신 유배형, 문석환·안항식·신보균·최상집·이상두는 3년 유배형을 받고 대마도로 끌려갔다. 이들보다 두달 후 태인에서 붙잡힌 최익현과 임병찬은 3년 유배형을 받고 역시 대마도에서 이들과 조우한다.

 

지산 김복한 선생이 거의한 을미의병 때 초모사로 외지에 나가 의병을 모집해 붙잡히지 않았던 이세영도 6월에 체포되어 황주의 철도로 유배가게 되었다.

 

한편 민종식 선생은 이날 성을 탈출해 예산의 이남규 집으로 피신해 재차 거의를 꾀했지만 일진회원의 밀고로 11월 17일 새벽에 일본 헌병과 관군 그리고 일진회원의 습격을 받았다. 이때 이남규와 이충구 부자가 체포되고, 민종식 선생은 다시 공주로 피신하였으나 11월 20일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도중 이남규 부자는 신창 평촌에서 살해되었다.

 

민종식 선생은 1907년 7월 3일 평리원 재판결과 교수형이 언도되었고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 유배형으로 감형되어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12월 순종 즉위에 맞춰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고향에 은거하다 1917년 6월 숨을 거뒀지만 일제는 민종식 선생을 ‘폭도’로 규정해 선영에 묻히지 못하다가 3개월이 지난 뒤에야 선영에 묻힐 수 있었다.



( ※ 이 기사는 호서역사문화연구원 이명우 원장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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