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픽] 6월은 붉은 눈물의 달
6월6일은 절기상 씨를 뿌린다는 망종(芒種)이자 현충일입니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이날 모내기를 하면서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이날, 전쟁에서 전사한
장병의 뼈를 집으로 모셔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 역사적 연유들로
6월6일을 현충일로 지정했다고 합니다.
'현충일'은 호국 영령을 기리는 날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유럽에서 시작됐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일인 11월 10일의 다음날인 11월11일 11시
연합군 참전국들은 매년 묵념으로 1분간,
그리고 2차 세계대전 후부터는 2분간
전사자를 추모합니다.
영국과 캐나다는 현충일의 상징으로
붉은 양귀비꽃을 삼고 있습니다.
양귀비꽃의 붉은 빛깔로 피를 상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직접적인 계기는 한 편의 시(詩)로
인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한 캐나다 군인의
전장에서 친구를 잃은 슬픔을 담은 시
'개양귀비 들판에서'
"플랜더스 들판에
개양귀비 꽃이 피었네.
줄줄이 서있는 십자가들 사이에서
그 십자가는 우리가 누운 곳을 알려준다네..." 로 시작하는 시입니다.
전사하여 들판에 누웠지만
끝까지 횃불을 놓지 말고 싸우자는 결의가 담겨 있습니다.
미국의 현충일은 남북전쟁에서 비롯됐습니다.
매년 5월의 마지막 월요일을
메모리얼 데이(Memorial Day)로 정해 기념하고 있습니다.
미국 국민들은 장병들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하는 마음은 물론이거니와
봉사로 보답하고 있습니다.
알링턴 국립묘지의 무명용사의 묘를 예로 들어볼까요.
이곳은 24시간,365일을 올드가드(old guard)가 지키고 있습니다.
올드가드는 군인중 신원 상의 어떤 흠도 없고,
국립묘지의 역사와 묘지들의 위치를 완벽하게 암기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어떤 날씨나 상황에서도 자리를 뜨지 않아야 합니다.
3시간마다 거행하는 올드가드 교대식은
엄숙하기로 유명해 관광객들의 명물이 되기까지 했습니다.
최고의 엄격성으로 근무하지만
올드가드는 어떠한 수당도 보상도 없습니다.
그저 목숨을 바친 무명용사를 지키는 일
그 자체가 최고의 명예입니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이 많습니다.
현충일이 지정된 1956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뷸과 68년 동안 서울과 대전 현충원 등
8개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호국영령은 약 20만 위를 넘는다고 합니다.
미국의 1865년 남북전쟁을 끝내고
현재까지 258년간 국립묘지에 안장된 영령수 약 29만 위에 비하면
최근의 짧은 기간에만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희생한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이 됩니다.
우리는 얼마나 치열한 역사를 살아왔던 것입니까.
조국을 위해서 희생하고
또 상이군경으로, 고엽제 환자로, 보훈대상자로,
또 그 유가족으로 살고 있는 이 땅의 은인들에게
우리 국민들은 행복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제68회 현충일을 맞아
제 가슴을 한 줄기 붉은 눈물로 길게 적시었던
모윤숙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개양귀비 들판에서" 와는 비교가 안될 뜨거운 감동이 있는 명시입니다.
이 시는 전문을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 그대로 옮깁니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런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핏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과 가시숲을 이순신같이, 나폴레옹같이, 시이저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모스크바 크레믈린 탑까지 밀어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나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노라.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지어 넘어진 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시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나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레 숨지었나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이슬 나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저 가볍게 날으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나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다오.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 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둘러싼 군사가 다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 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다.
다시 오지 않으리라.
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리와 사자 떼가 강과 산을 넘는다.
내 사랑하는 형과 아우는 시베리아 먼 길에 유랑을 떠난다.
운명이라 이 슬픔을 모른체 하려는가?
아니다.
운명이 아니다.
아니 운명이라도 좋다.
우리는 운명보다는 강하다! 강하다!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 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 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 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
나는 유쾌히 이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 1950년 8월 그믐 광주(廣州) 산곡(山谷)에서-
"보훈"은 우리의 도리요, 명예요, 사명입니다.
- 세종특별자치시장 최민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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