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의 국력 차이로 후진국 콤플렉스가 만연했던 시절이라 여전히 기억 속에서 생생한 일화입니다.
일본 동경대학에서 유학하던 시절, 당시 일본 대학의 수업 분위기에 너무나도 놀랐습니다. 일본 학생들이 교수님의 강연 내용을 손으로 받아쓰는 게 아니라 말하는 속도대로 노트북으로 타이핑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90년대 초반이라 하면 우리나라는 데스크톱 워드프로세서를 겨우 도입하여 사무실 문서를 타이피스트가 타자를 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 저는 노트북을 본 적도 없었고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노트북에 화들짝 놀란 것도 있지만 더 기가 찼던 것은 일본 학생들의 얘기였습니다. 그들은 일제 식민지 이야기 따위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한국은 미개하고 가난한 후진국의 나라로 알고 있는 정도였고, 김치 냄새는 일본인들이 역겨워하니 아침에는 먹지 말고 저녁에 먹으라는 충고를 어느 재일교포가 해주는 정도의 시절이었습니다.
그들의 평화롭고 윤택한 일상은 물가고에 시달리는 유학생에게는 부럽기만 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미국에 빌딩과 땅을 사들일 정도로 일본 붐이 세계적으로 풍미했었습니다.
소니 전자 제품과 도요타 자동차, 워크맨, 니콘 카메라, 후지필름 등 그들의 기술력과 그들의 부유함, 그들의 자신감에 가난한 한국인 유학생은 후진국 콤플렉스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측은한 눈초리로 저를 쳐다보는 한 일본인 학생에게 나는 말했습니다.
"일본 젊은이 너희들은 참 행복해 보인다. 그렇지만 나는 더 행복하다."
왜냐고 묻는 그에게 저는 한용운 선생의 말을 인용해 답했습니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의 조선 청년을 가리켜 불운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촌학구(村學究 : 시골학생) 아니면 근시안적인 유부(儒夫:유학자)의 소견일 뿐이다. 나라를 빼앗긴 조선 청년은 시대적 행운아이다. 왜냐하면 역경에 둘러싸여 조국의 독립이라는 위대한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정작 불운아는 이미 다 이루어져 할 일이 없는 미지근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들은 불우하다...
한국은 해야 할 일이 태산같이 많은 나라이다. 개발도상국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나라의 청년이고 공무원이라 행복하기만 하다.”
당시의 내 말을 그 일본인 학생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혹 그 학생이 내 말을 기억하고 있다면, 또 만날 수 있다면 30여년이 지난 지금 일본에 못지않게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한국과 당시 청년 공무원이었던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하기만 합니다.
그때 같이 공부했던 일본인 학생들이 보고 싶었습니다. 금번 일본 출장 중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한 친구는 국회의원과 장관급 직위를 지냈습니다. 또 한 친구는 유명한 연구소의 최고 책임자가 되어 있었고, 또 한 친구는 소방청의 최고위직이 되어 나름대로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보다 더 행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라를 위해 해야만 했던 더 많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일이 있는" 청년만큼 행복한 사람이 없습니다. 해야 할 일 때문에 가슴이 뛰고 근육이 꿈틀대고 밤잠을 설치도록 치열한 청춘. 그런 시기는 누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 직원 여러분들도 그런 뜨거운 시절과 열정이 있지 않습니까? 세종시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는 행복한 시기. 바로 지금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