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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고 잔잔하게 피어 내리는 불꽃. 낙화(落火).
낙화는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사월초파일 ‘연등회’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연등회’라 함은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초파일날 거리에 걸리는 ‘연꽃등’으로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한자로 탈 연(燃), 등불의 등(燈) ‘연등회(燃燈會)’였습니다.
즉 불꽃을 태우고 등불을 보는 연회(燃會)와 등회(燈會)가 따로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덧 '연'은 사라지고 '등'만 남아 버리고 만 것이지요.
이제까지 4월 초파일날 거리와 절집에 등을 매달았던 것은 반쪽짜리 연등회였던 것입니다.
연등회의 사라진 나머지 반쪽은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낙화축제였습니다.
어쩌다가 연등회의 불꽃의례는 단절되고 맥이 끊어졌을까요.
낙화를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가 종이, 숯, 소금 등입니다.
당시의 생활을 고려해 볼 때, 한지종이는 상당히 고가였고 숯도 귀한 재료였으며, 소금도 일반 백성은 구하기 힘든 재료였습니다.
귀하디 귀한 재료들만을 삼아서 연을 만들고 그것을 태워 의례를 여는 일은 정말로 고급스럽고 사치스럽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당대의 왕궁, 귀족, 재력가들의 후원과 종교적인 의미가 없었더라면 지속되기 어려웠음을 짐작케 합니다.
낙화 축제는 대단히 귀족적이고 고급스러운 축제였던 것입니다.
낙화 축제는 간신히 민간의 놀이로 전승되어 여기저기서 놀이 형태로 남아있긴 합니다만, 불교의 전통적인 방식을 전승시켜 온 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 세종시 영평사에 계신 환성스님과 그의 제자 광제사 원행스님이었습니다.
환성스님과 원행스님을 중심으로 ‘불교낙화법 보존회’가 결성되고 낙화축제의 보존과 재현을 위한 절박한 노력이 계속됐습니다.
저는 낙화축제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그 문화재적 가치를 음미하면서 천년이 훨씬 넘은 낙화 축제가 그 형태를 변형하지 않고 남아있다는 사실에 진실로 경탄했습니다.
저는 고귀하고도 아름다운 전통이 소실되지 않도록 ‘보존회’에 우선적으로 전승기법의 특허를 취득하여 지적 재산권을 확보토록 했습니다. 그리고 ‘세종시 낙화축제’를 시작하면서 금년 2월13일에는 세종시 지방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올해 두 번째 낙화축제를 개최하였습니다.
첫해의 교훈을 토대로 올해는 축제의 내용과 진행 수준을 높이고 수만 명의 군중이 운집할 것을 예상하고 안전사고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놀랍게도 예상 인원을 훨씬 상회하는 무려 8만 명이 중앙공원에 운집하였지만, 질서정연하고 안전한 축제 진행에 많은 시민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축제내용은 물론이고, 과거의 방식을 온전히 재현했다는 점에서 세종시의 대표축제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세종시가 이토록 낙화축제를 중히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서양의 불꽃놀이랑 비교하면 그 가치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불꽃놀이는 위를 향해 쏘아 올리며 형태와 색의 화려함을 자랑합니다. 중력을 거슬러 하늘로 빛을 올려내야 하니 요란한 소리를 동반합니다. 이른바 보기 좋은 쇼(show)를 방불케 합니다.
낙화축제는 정반대입니다.
불꽃을 아래로 떨어지도록 연출하면서 고요함 속에서 나의 마음을 정화하고 우리와 공동체를 위하는 소원을 빕니다. 축제 시간중 불빛과 소음을 멈춘 ‘정적(靜寂)’의 시간을 가진 것은 그런 의미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요하고 고귀한 가치를 지닌 우리의 전통 문화유산인 것입니다.
저는 확신했습니다.
전통을 그저 옛것, 사라져버린 과거의 관습으로 치부하기보다 현재에 맞게, 미래를 향해 넓혀가는 지속가능한 문화자산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직원들에게도 고마움과 찬탄의 박수를 보냅니다.
모두가 똘똘 뭉쳐 부서의 경계, 역할을 넘어 일해준 덕분에 세종시의 또 다른 가치와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낙화축제는 전통의 재발견일 뿐만 아니라, 우리 직원들의 역량도 재발견하는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모두들 수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세종특별자치시장 최민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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