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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호 시장의 월요편지 #59
저는 어느 때인가부터 소위 미래학자들을 별로 믿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을 풍미하며 절대 진리처럼 보였던 그들의 주장이 세월이 흐르고 보면 맞지 않는 것을 종종 보았기 때문입니다.
1798년 영국의 맬서스는 ‘인구론’에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기 때문에 과잉인구로 인한 식량부족은 필연적으로, 그로 인해 빈곤과 죄악은 불가피하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주장은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미쳐 찰스 다윈은 인구론을 읽고 진화론의 기제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이 ‘인구론’은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료와 농약 등의 개발로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는 기술혁신의 영향력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산아제한, 결혼 연기, 독신주의 등을 출산율을 낮추고, 빈민 구제 금지와 전쟁 등을 통해 사망률을 높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세계는 식량 문제보다 저출산과 인구감소가 더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1776년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경제는 시장에 자유방임하여야 하며, 그리하면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le)’에 의해 가격이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 경제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명저로 그 영향력은 실로 지대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보이지 않는 손’은 결국 자본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만을 초래하고 만다는 사실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1867년 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부의 편중 및 노동가치를 무시한 자체 모순으로 멸망하고 만다’라는 ’자본론‘을 출간했습니다. ’자본론‘은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책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만, 그의 주장인 ’공산주의‘는 수많은 지성인을 광분시켜 혁명과 전쟁으로 수없는 사람을 희생시킨 끝에 구소련의 해체와 구동독의 붕괴, 그리고 북한의 실례를 통해 실패한 주장으로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인간사의 과거를 분석하는 것은 용이할지 모르지만,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무모했던 것인가를 실감하게 됩니다. 다만, 이들의 이론이 비록 완전히 맞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지성을 깨우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 역사의 가장 큰 변화를 초래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측할 수 없었던 그 불확실한 요소는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무궁무진하고 오묘하기만 하여 아무리 해도 알 수 없는 자연의 법칙, 그 중의 극히 일부만을 밝혀도 세상이 뒤집어지는 ‘과학기술’의 발전이라고 봅니다. 과학기술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채 세상을 하루아침에 바꾸어 버리기도 합니다.
미국은 원자폭탄을 개발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고 수백만의 인명을 순식간에 앗아가면서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버렸습니다. 아직도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 국가와 국민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쓰는 세대와 그런 기기를 알지 못하는 세대는 삶뿐만 아니라, 생각과 이념마저 다를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AI(인공지능)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어쩌면 인간의 존재 자체를 재구성할지 모릅니다. 뇌와 신체에 인공 칩을 주입시켜 인간 이상의 인간인 사이보그(cyborg) 인간이 태어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수명의 한계를 뛰어넘는 이러한 생명공학적 신인류가 만들어진다면 인간은 신의 영역에 들어가는 단계로 종래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맞게 될 것입니다.
신기술의 혜택이 모든 인간에게 골고루 돌아갈 것인가, 일부 인간의 전유물이 될 것인가에 따라 ‘슈퍼 인간’, ‘무용한 계급의 쓸모없는 인간’, 아니면 ‘아웃사이더로 무관한 인간’으로 ‘신분’이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히브리 대학의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이런 시점을 '특이점(singurarity)'이라고 부르며 이 시기를 2050년 경이라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을 호모사피엔스(Homosapiens)에서 호모데우스(Homodeus)로 부르자고 합니다. 호모는 인간이라는 뜻이고 사피엔스는 지혜, 데우스는 신(god)이라는 뜻입니다.
과학기술의 진화는 가속도로 진전하고 있습니다. AI를 비롯한 디지털 신기술은 행정을 비롯한 사회, 경제, 문화 등 전 분야의 질서를 빛의 속도로 재편하고 있습니다. 챗GPT는 수 초만에 글과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무섭습니다. 그러나 이에 뒤쳐져서는 ‘쓸모없는 무용인간’이 될지도 모릅니다.
지난주 세종시와 행정안전부는 디지털플랫폼 정부에 발맞추어 '민원 구비서류 제로화'를 선언하였습니다. 2026년까지 1,498종의 민원과 공공서비스에 대해 구비서류를 전면 없앤다고 한 것입니다. 쓰나미처럼 다가오는 거대한 변화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능동적인 도전 정신이 절실해집니다. 미래의 예측이 틀리기를 바라면서도 말입니다.
우리는 창조와 도전의 호모사피엔스입니다.
- 세종특별자치시장 최민호 -
[시사픽] - 미래사회의 운명 -
저는 어느 때인가부터 소위 미래학자들을 별로 믿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을 풍미하며 절대 진리처럼 보였던 그들의 주장이 세월이 흐르고 보면 맞지 않는 것을 종종 보았기 때문입니다.
1798년 영국의 맬서스는 ‘인구론’에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기 때문에 과잉인구로 인한 식량부족은 필연적으로, 그로 인해 빈곤과 죄악은 불가피하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주장은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미쳐 찰스 다윈은 인구론을 읽고 진화론의 기제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이 ‘인구론’은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료와 농약 등의 개발로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는 기술혁신의 영향력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산아제한, 결혼 연기, 독신주의 등을 출산율을 낮추고, 빈민 구제 금지와 전쟁 등을 통해 사망률을 높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세계는 식량 문제보다 저출산과 인구감소가 더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1776년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경제는 시장에 자유방임하여야 하며, 그리하면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le)’에 의해 가격이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 경제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명저로 그 영향력은 실로 지대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보이지 않는 손’은 결국 자본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만을 초래하고 만다는 사실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1867년 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부의 편중 및 노동가치를 무시한 자체 모순으로 멸망하고 만다’라는 ’자본론‘을 출간했습니다. ’자본론‘은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책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만, 그의 주장인 ’공산주의‘는 수많은 지성인을 광분시켜 혁명과 전쟁으로 수없는 사람을 희생시킨 끝에 구소련의 해체와 구동독의 붕괴, 그리고 북한의 실례를 통해 실패한 주장으로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인간사의 과거를 분석하는 것은 용이할지 모르지만,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무모했던 것인가를 실감하게 됩니다. 다만, 이들의 이론이 비록 완전히 맞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지성을 깨우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 역사의 가장 큰 변화를 초래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측할 수 없었던 그 불확실한 요소는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무궁무진하고 오묘하기만 하여 아무리 해도 알 수 없는 자연의 법칙, 그 중의 극히 일부만을 밝혀도 세상이 뒤집어지는 ‘과학기술’의 발전이라고 봅니다. 과학기술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채 세상을 하루아침에 바꾸어 버리기도 합니다.
미국은 원자폭탄을 개발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고 수백만의 인명을 순식간에 앗아가면서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버렸습니다. 아직도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 국가와 국민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쓰는 세대와 그런 기기를 알지 못하는 세대는 삶뿐만 아니라, 생각과 이념마저 다를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AI(인공지능)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어쩌면 인간의 존재 자체를 재구성할지 모릅니다. 뇌와 신체에 인공 칩을 주입시켜 인간 이상의 인간인 사이보그(cyborg) 인간이 태어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수명의 한계를 뛰어넘는 이러한 생명공학적 신인류가 만들어진다면 인간은 신의 영역에 들어가는 단계로 종래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맞게 될 것입니다.
신기술의 혜택이 모든 인간에게 골고루 돌아갈 것인가, 일부 인간의 전유물이 될 것인가에 따라 ‘슈퍼 인간’, ‘무용한 계급의 쓸모없는 인간’, 아니면 ‘아웃사이더로 무관한 인간’으로 ‘신분’이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히브리 대학의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이런 시점을 '특이점(singurarity)'이라고 부르며 이 시기를 2050년 경이라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을 호모사피엔스(Homosapiens)에서 호모데우스(Homodeus)로 부르자고 합니다. 호모는 인간이라는 뜻이고 사피엔스는 지혜, 데우스는 신(god)이라는 뜻입니다.
과학기술의 진화는 가속도로 진전하고 있습니다. AI를 비롯한 디지털 신기술은 행정을 비롯한 사회, 경제, 문화 등 전 분야의 질서를 빛의 속도로 재편하고 있습니다. 챗GPT는 수 초만에 글과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무섭습니다. 그러나 이에 뒤쳐져서는 ‘쓸모없는 무용인간’이 될지도 모릅니다.
지난주 세종시와 행정안전부는 디지털플랫폼 정부에 발맞추어 '민원 구비서류 제로화'를 선언하였습니다. 2026년까지 1,498종의 민원과 공공서비스에 대해 구비서류를 전면 없앤다고 한 것입니다. 쓰나미처럼 다가오는 거대한 변화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능동적인 도전 정신이 절실해집니다. 미래의 예측이 틀리기를 바라면서도 말입니다.
우리는 창조와 도전의 호모사피엔스입니다.
- 세종특별자치시장 최민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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