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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충절의 고장 충남에 있어야 할 의병기념관 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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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특집

[기획] 충절의 고장 충남에 있어야 할 의병기념관 ➁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

홍주읍성1.JPG
구한말 1895년 을미사변과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항쟁의 중심지가 된 홍주성


[시사픽] 충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1.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①)

4-2.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②)

4-3.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③)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역사학자 박은식(朴殷植)은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요 국성(國性)이다”라며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 민족은 외세의 침탈을 당할 때마다 민초들이 분연히 일어나 저항했다.

 

대표적인 민초들의 조직적인 저항은 임진왜란을 통해 나타났다. 도성이 왜군의 침입에 불과 20여일만에 침탈당하고 개전 초기 관군이 패퇴를 거듭했지만 유생들의 창의로 거병한 의병들은 곳곳에서 왜군들을 괴롭히며 단독으로 성을 탈환하거나 관군과 함께 왜적을 무찔렀다.

 

임진왜란 때 활약이 컸던 의병장으로는 충청도의 조헌(趙憲)부자·박춘무(朴春茂), 경상도의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정세아(鄭世雅)·권응수(權應銖)·김해(金垓)·곽준(郭鵔)·유종개(柳宗介)·이대기(李大期)·제말(諸沫)·손인갑(孫仁甲)·조종도(趙宗道)·정경세(鄭經世), 전라도의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고종후(高從厚)·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최경회(崔慶會)·김덕령(金德齡)·변사정(邊士貞)·양산숙(梁山璹)·임계영(任啓英), 경기도의 홍계남(洪季男)·우성전(禹性傳)·이정암(李廷馣,) 함경도의 정문부(鄭文孚) 등을 꼽을 수 있다.

 

또 승병으로는 최초의 승병장인 영규(靈圭)와 휴정(休靜, 西山大師)과 그의 제자들인 황해도의 의엄(義嚴), 강원도의 유정(惟政, 松雲大師), 호남 지리산의 처영(處英)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의병장은 대부분 전직 관료이거나 지역의 명망있는 유림이었지만 거병에 참여한 의병들은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때에도 의병이 봉기했는데 동기는 관군의 패배로 수습하기 어려운 난국을 타개하자는 데 있었다.

 

호란 중의 의병 활동은 왜란에 비해 활발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왜란에 비해 호란은 짧은 시간에 인조가 성하지맹(城下之盟)으로 청나라에 굴복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충남의 사계 김장생(金長生)은 1627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했다. 또 정봉수(鄭鳳壽)는 강화가 성립된 뒤에도 용골산성(龍骨山城)에서 여러 차례 의병을 이끌고 수만의 후금군을 물리쳐 성을 지키는 데 공을 세웠다.

 

이어 구한말에는 일제가 일으킨 을미사변(1895)과 을사늑약(1905)에 항거한 의병활동이 눈부시다.

 

구한말의 의병은 크게 1895∼1896년의 을미의병과 1905∼1910년의 을사, 병오, 정미 의병으로 나뉜다.

 

을미의병은 1894년 갑오경장을 겪으며 일본에 의해 복제의 변형, 민비시해사건, 그리고 단발령이 발표되자 일어났다.

 

을미의병의 효시는 유성의병이다. 충남 진잠현의 현감 문석봉(文錫鳳, 1851~1896)은 명성황후가 1895년 음력 8월21일 시해되고 이틀후에 폐비조칙이 발표되자 한달도 채 되기 전인 9월 18일 유성(대전광역시 유성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어 홍주에서 김복한(金福漢)·이설(李偰)·안병찬(安炳瓚)이 12월 1일에 봉기했고, 1896년 1월 하순 유생 이소응(李昭應)이 춘천에서 봉기하여 관찰사 조인승(曺寅承)을 처단한 것을 비롯하여, 금산에서 이은찬(李殷瓚)·허위(許蔿), 강릉에서 민용호(閔龍鎬), 제천에서 유인석(柳麟錫)·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 남한산성·안성에서 김하락(金河洛), 문경에서 이강년(李康秊), 안동에서 권세연(權世淵)·김도화(金道和), 영양에서 김도현(金道鉉), 진주에서 노응규(盧應奎), 장성에서 기우만(奇宇萬) 등이 일어났다.

 

이들 의병활동은 대부분 실패했지만 의병이 일어난 지 한달만에 김홍집(金弘集) 친일 내각이 붕괴되어 단발령이 철회됐고 김복한의 경우처럼 고종이 재판이 끝나자마자 특사로 풀어주는 등 의병을 선유(宣諭)해 일제는 침략을 일시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제2차 의병전쟁은 일명 을사의병·정미의병이라고도 한다.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결과 일본이 승리하고 소위 을사조약을 통해 통감정치를 시도하자 국권 상실을 우려한 우국지사들의 저항에서 비롯됐다.

 

이 시기의 의병장으로서 가장 이름난 사람은 홍주의 민종식(閔宗植)이었다.

 

1906년 5월 홍주를 점령한 민종식부대 1,000여명은 여러 차례 일본 군대의 공격을 물리치고 6월 1일 서울에서 특파된 일본군과 서로 맞섰다. 기관포대와 폭파대로 보강된 일본군을 맞아 분전한 민종식의 의병군은 을사조약 이후 가장 큰 봉기였다.

 

이어 충남 청양에 머물던 최익현이 전라북도 태인에서 봉기해 토적하려 했으나 순창에서 관군에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고 단식 끝에 순사해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민종식과 최익현의 의병은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켜 1907년 이후에는 전국의 유생과 농민이 봉기하여 가히 독립전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큰 저항 운동으로 발전했다. 특히 정미년(1907)의 한국군대 해산은 의병 활동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1907년 8월 1일 일제가 한국군을 강제 해산하자 이에 항거한 군인들과 의병이 서로 연합하여 대대적인 무장항일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들 해산된 한국군 병사는 각기 지방의 의병군에 가담하여 조직적인 항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 시기의 의병장은 원주의 원용팔(元容八)·민긍호(閔肯鎬), 죽산·안성의 박석여(朴昔如), 양근·여주의 이범주(李范疇), 경상도의 이유인(李裕寅)·이하현(李夏玄)·정환직(鄭換直)·정용기(鄭傭其)·최성집(崔聖執)·신돌석(申乭錫)·김현규(金顯奎), 전라도의 기우만·백낙구(白樂九)·양한규(梁漢奎)·고광순(高光洵)·김동신(金東臣), 함경도의 홍범도(洪範圖), 그리고 충북의 노병대(盧炳大) 등을 들 수 있다.

 

비록 일본 경찰이 낸 통계이기는 하지만 1908년 의병들은 1976회에 걸쳐 8만2767명의 의병이 참여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이들중 충남의 의병은 217회(11.0%)의 전투에 7666명(9.2%)의 의병이 참여했다.

 

또 1909년에는 전국적으로 1738회의 전투에 3만8593명이 참여했으며 이 가운데 충남은 1003명(2.5%)의 의병이 138회(7.9%)의 전투를 벌였다.

 

이들 의병들은 일본군이 주둔한 주요 도시를 제외한 각처에서 일본인을 살해하고 관아를 비롯해 면사무소, 경찰분파소, 우체국 그리고 전당포 등을 파괴했다.

 

이에 일본군은 의병 토벌에 나서 본국의 군대까지 끌어들여 군사력을 더욱 강화했다.

 

 

( ※ 이 기사는 호서역사문화연구원 이명우 원장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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